24화
첫 전공 수업과 선명한 존재감
다음 날 아침.
아르카눔 하늘 위로 맑고 투명한 아침 햇살이 비스듬히 깔렸다.
카오스포지 아카데미를 가로지르는 푸른 마도 결계 장막이 이른 아침의 서늘한 바람에 흔들리며 은은한 빛을 피워 올렸다.
오클러 학과 동관 304호.
현경은 단정한 사복 차림에 허리춤 가죽 벨트를 단단히 조여 매었다.
석조 벽면에 박힌 마도 온열 아티팩트의 온기가 방안을 서늘하지 않게 감싸고 있었다.
허리춤에는 어젯밤 아르카눔 지하 암시장에서 손에 넣은 붐크레프트의 전용 검집, '봉인의 검집'이 묵직하게 걸려 있었다.
붉은 룬도, 지옥로의 마동음도 단 한 톨조차 흘러나오지 않는 완벽한 억제 상태.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고풍스럽고 단단하게 가공된 검은 철검처럼 보일 뿐이었다.
현경은 빗장을 풀고 기숙사를 나섰다.
이른 아침의 교정 산책로에는 수많은 학과 학생들이 정식 제복과 가방을 챙겨 들고 이동하고 있었다.
중앙 광장 분수대 인근.
푸른 마력등 빛 아래, 마법사 학과의 은빛 제복을 입은 레나가 로비 길목에 서 있었다.
레나는 손에 따뜻한 마도 차가 담긴 가죽 컵 두 개를 든 채, 오클러 학과 동관 쪽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허리춤에 묵직한 검집을 차고 다가오는 현경을 발견하자 레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어? 오빠!"
레나가 신기한 표정으로 쇄도하듯 다가왔다.
"허리춤에 그거... 검집이야? 천 뭉치 걷어내고 언제 검집을 만들었어?"
레나가 차 컵을 하나 건네며 허리춤의 봉인의 검집을 유심히 둘러보았다.
"어젯밤에 카이론 도움을 좀 받아서 지하 암시장에서 하나 구했어."
현경이 차를 한 모금 머금으며 따뜻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레나가 입을 살짝 벌리며 감탄했다.
"와... 카이론 님이 직접? 역시 어젯밤에 비밀 경매장에 다녀온 거였구나! 훨씬 단정해 보여. 마력 잔향도 완벽하게 억누르고 있고."
레나는 안도하는 미소를 지으며 오빠의 검집을 토닥였다.
"그 천 뭉치 메고 다닐 땐 아카데미 경비 골렘들이 유심히 쳐다봤는데, 이젠 진짜 오클러 기사 같아 보여."
"그냥 평범한 철검처럼 보여서 다행이지."
"히히, 그게 제일 좋은 거지! 정체를 가려야 하니까."
레나가 오빠 옆을 평화롭게 거닐며 아카데미 교정 건물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은빛 첨탑이 내가 수업 듣는 마법사 학과 본관이고, 오른쪽에 보이는 검은 석조 건물이 연무장이야. 오빠 수업 마칠 때 맞춰서 이 산책로에서 자주 보자."
"그래, 레나야. 자주 보자."
"참, 오늘 아침 첫 전공 수업이 오클러 학과 101호 대강의실이지? '오클 응결과 구조학' 강의."
"응, 서류에 그렇게 적혀 있더라고."
"거기 학과장 레온하르트 교수님이 진짜 딱딱하고 원칙주의자셔. 귀족 파벌 학생들이 편입생들 테스트하려고 은근히 눈치 줄 수도 있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레나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당부했다.
"그리고 내 친구 에일린 알지? 마도 연구동 지하 공방에서 맨날 골렘 부품을 분해하느라 기름때를 묻히고 다니거든. 오늘 점심 먹고 시간이 되면 같이 공방에 구경 가자!"
현경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무 걱정하지 마, 레나야. 조용히 수업 잘 듣고 올 테니까."
"응! 수업 마치고 점심때 대도서관 지하 빵집에서 만나자.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레나가 손을 활짝 흔들며 마법사 학과 본관 계단을 향해 가볍게 뛰어갔다.
현경은 동생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오클러 학과 101호 대강의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오클러 학과 동관 101호 대강의실.
까마득하게 높은 아치형 천장과 계단식 석조 좌석들이 배치된 웅장한 강의실이었다.
강의실 내부에는 이미 40여 명의 오클러 학과 학생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화려한 금빛 문양이 새겨진 제복과 고급 마도 반지들을 낀 제국 귀족 파벌 학생들.
그리고 단정한 사복이나 일반 갑주를 입은 일반 편입생들.
좌석 간에는 은연중에 명확한 파벌의 경계선이 그어져 있었다.
현경은 강의실 맨 뒷줄 어두운 석조 좌석으로 이동해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허리춤의 봉인의 검집을 무릎 옆에 단단히 고정해두었다.
지나가던 몇몇 귀족 학생들이 현경의 무심한 태도와 허리춤의 둔탁한 철검을 흘끔거렸다.
"저자가 어제 흑경 님의 붉은 인장으로 편입했다는 그 자인가."
"마력 측정 기록이 없는 편입생이라지?"
"체술만으로 시험 마수를 꺾었다더군. 하지만 여긴 오클 응결 학과다. 마력 생성과 응결 능력이 없으면 버티지 못할 텐데."
건조하고 시니컬한 속삭임들.
현경은 그들의 시선에 일절 동요하지 않았다.
가슴 깊은 곳.
지옥로의 정적을 완벽하게 가라앉힌 채, 책상 위 양장 서적을 조용히 펼쳐 들었다.
탁- 탁-
그때, 대강의실 입구에서 무거운 구두 소리가 울렸다.
은테 단안경을 끼고 묵직한 마법 로브를 입은 백발의 노교수, 학과장 레온하르트가 단상 위로 올라섰다.
강의실 전체가 순식간에 차가운 정적 속으로 가라앉았다.
레온하르트 교수는 매서운 눈빛으로 학생들을 한번 훑어보았다.
"오늘 수업은 오클 응결이 마도 아티팩트에 미치는 구조적 동조 반응과 회로 정류 이론이다."
교수의 건조하고 딱딱한 목소리가 강의실 석조 벽에 나직하게 울렸다.
"응결 능력 자체는 오직 개인의 타고난 역량이자 각자 다듬어야 할 영역이다. 학과에서 실기를 가르치거나 순도 등급을 매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오클 결정체를 마도 아티팩트 회로에 어떻게 손실 없이 동조시키느냐는 교과적 이론의 영역이지."
레온하르트 교수는 단상 위에 배치된 투명한 마도 회로 반응 구체를 가리켰다.
"이것은 아티팩트 회로 파동 동조 측정기다. 지명된 학생은 단상으로 나와 자신의 오클 파동을 아티팩트 회로에 동조시켜 보도록 한다."
교수의 깃펜이 지명 명단을 훑어렸다.
귀족 파벌의 뛰어난 학생들이 몇몇 단상으로 올라가 마력을 파동에 동조시켰다.
위잉-
투명한 구체 속에서 푸른 회로 불빛이 피어오르며 파동 동조율이 측정되었다.
"알렉스 학생. 동조율 84%. 우수하다."
"카트린 학생. 동조율 88%. 훌륭하군."
귀족 학생들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그때, 레온하르트 교수의 시선이 맨 뒷줄 어두운 석조 좌석에 앉은 현경에게 머물렀다.
"다음. 편입생 키안."
강의실 안 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현경을 향해 쏠렸다.
흑경 케이의 추천으로 편입한 낯선 편입생.
귀족 학생들의 눈빛에는 실력을 확인하겠다는 서늘한 호기심이 서려 있었다.
현경은 자리에서 차분하게 일어났다.
허리춤의 검집을 다잡으며 단상을 향해 묵직한 발걸음을 옮겼다.
현경은 단상 위 투명한 아티팩트 동조 구체 앞에 섰다.
가슴 깊은 곳 지옥로의 압도적인 권능과 헬켈베로스의 지옥불.
만약 지옥로의 힘을 단 한 톨이라도 마력으로 배출한다면, 아티팩트 구체는 순식간에 폭발하고 아카데미 전체에 위험 경보가 울릴 터였다.
현경은 지옥로의 마력을 100% 철저하게 가두어 두었다.
대신 가슴 부근의 미세한 신체 근육과 중심축을 정교하게 조율했다.
테리우스가 수메르로에서 기물과 마력을 다루던 완벽한 지경의 체능적 감각.
오직 호흡과 신체 악력의 압력만으로, 공기 중에 부유하는 아주 미미한 마나 입자들을 회로 파동에 정교하게 맞추었다.
스르륵-
현경의 손끝이 아티팩트 구체 표면에 부딪히자, 구체 내부의 마도 회로 불빛이 거짓말처럼 차분하고 완벽한 일직선을 이루며 켜졌다.
거친 마동음도, 과시적인 마력 폭발도 없었다.
그저 단 한 톨의 마나 낭비나 파동 흔들림도 없는 완벽한 100% 동조율.
"..."
강의실 전체가 깊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레온하르트 교수는 은테 단안경을 고쳐 쓰며 아티팩트 측정 구체의 수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파동 동조율 100%..."
교수의 건조한 목소리에 미세한 동요가 서렸다.
"마력의 양을 과시하지 않고, 단 한 톨의 파동 흔들림도 없이 아티팩트 회로와 완벽하게 일체화시켰다."
귀족 학생들의 얼굴에서 서늘한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마력 배출을 일절 하지 않으면서도, 결점 하나 없는 100% 파동 동조를 이뤄낸 것은 아카데미 상급 오클러들조차 쉽게 보여주지 못하는 경지였다.
현경은 손을 떼고 무심하게 고개를 조아렸다.
"시범을 마쳤습니다."
"음... 좋다. 자리로 돌아가라."
교수의 묵직한 수긍이 이어졌다.
현경은 다시 차분한 발걸음으로 대강의실 맨 뒷줄 자리로 돌아왔다.
수업이 끝난 후.
학생들이 조용히 소지품을 챙겨 강당을 나서기 시작했다.
현경을 바라보던 귀족 학생들의 눈빛에는 더 이상 가벼운 무시나 멸시가 남아있지 않았다.
묵직하고 은밀한 실력을 감춘 낯선 편입생을 향한 서늘한 경계심뿐이었다.
현경은 책상 위의 양장 서적을 챙겨 들었다.
허리춤의 봉인의 검집을 고쳐 차며 대강의실을 나섰다.
대도서관 지하 1층 빵집.
따끈따끈한 마도 오븐 파이 향기가 은은하게 번지는 휴게 공간이었다.
창가 석조 테이블에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레나가 현경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환하게 손을 흔들었다.
"오빠! 여기야!"
레나의 테이블 위에는 갓 구워낸 마도 버섯 파이와 따뜻한 차가 차려져 있었다.
현경은 의자에 조용히 앉았다.
"첫 수업 어땠어? 레온하르트 교수님 수업 괜찮았어?"
레나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아티팩트 회로 동조 시범이 있긴 했는데, 별문제 없이 잘 끝났어."
"거봐! 내가 오빠 실력이면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했잖아."
레나가 파이를 한 조각 내밀며 배시시 웃었다.
"파동 동조 시범이라길래 회로 손실 없이 100% 동조시켰더니 교수가 별말 없이 넘어가더라고."
"와... 회로 동조율 100%?! 역시 우리 오빠는 대단해!"
레나가 진심으로 기뻐하며 손뼉을 쳤다.
점심 식사를 마친 후.
레나는 현경을 이끌고 대도서관 건너편 마도 연구동 지하 공방으로 향했다.
지하 계단을 내려가자 구리 파이프 마찰음과 아티팩트 렌치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쾅- 콰직-
공방 문을 열자 온갖 마도 골렘 관절 부품과 찌그러진 아티팩트 장비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넓은 연구실이 나타났다.
그 중앙에서 이마에 먹칠을 묻힌 채 커다란 마도 렌치를 들고 서 있던 양갈래 머리의 소녀.
마법사 학과의 매드 사이언티스트, 에일린(Eileen)이었다.
"어? 레나 왔어? 어라, 옆에는 편입했다는 그 오빠분인가?"
에일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렌치를 내려놓았다.
에일린의 시선이 곧바로 현경의 허리춤에 걸린 '봉인의 검집'에 꽂혔다.
"잠깐만... 그 허리춤에 든 검집, 수메르로의 특수 방마 아티팩트 합금 맞지? 우와, 룬 새겨진 솜씨 좀 봐! 이거 어디서 구했어?"
에일린이 눈을 반짝이며 다가오려 하자 레나가 헛웃음을 치며 막아섰다.
"에일린, 오빠 검집 분해할 생각은 하지 마!"
"에이, 분해 안 해! 살짝 룬 궤적만 측정해 보려고 한 건데."
에일린이 입술을 삐죽이며 툴툴거렸다.
에일린은 작업대 위에서 작은 정밀 마도 측정 게이지를 가져와 검집 표면을 살짝 비추어 보았다.
"진짜 대단하다... 외부 마동음을 100% 봉쇄하는 특수 금속 기물이야. 내부의 무기가 얼마나 흉악한 무기이길래 이런 검집을 씌운 거지?"
현경은 에일린의 당돌하고 엉뚱한 행동을 무심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반가워. 키안이라고 해."
"응! 난 에일린이야. 마도 공학 장비나 아티팩트 수리 필요하면 언제든 날 찾아와. 공임비는 깎아줄 테니까!"
에일린이 자신만만하게 장갑을 털어냈다.
동생 레나와의 아늑한 티키타카.
그리고 새로 알게 된 엉뚱한 마도 공학자 에일린과의 만남.
현경은 레나와 함께 에일린의 공방을 나와 노을빛이 내리는 교정 산책로를 함께 걸었다.
아카데미 경내를 감싸 안은 은은한 마도 램프 빛이 길가 석판 위로 은 은빛 광채를 피워 올렸다.
"오빠, 아카데미 적응하는 데 도움이 좀 될 것 같아?"
레나가 오빠를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응, 고마워. 많은 도움이 됐어."
현경은 허리춤의 묵직한 검집을 다잡으며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 레나를 지키고 이 세계에 확고히 뿌리내리기 위한 카오스포지 아카데미에서의 첫날.
그 묵직하고 서늘한 행보가 단단하게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