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심야의 은밀한 방문자와 붐크레프트의 검집

밤 10시.

카오스포지 아카데미를 관통하는 정적의 시각.

아카데미 경내를 가로지르는 푸른 마도 결계 장막이 한층 더 짙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교정 곳곳에서는 거대한 순찰 마도 골렘들이 중후한 기계음을 내며 석판 길을 밟아나가고 있었다.

위잉- 쿵- 쿵-

통금 시간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나직한 진동음이었다.

오클러 학과 동관 304호.

현경은 창문을 살짝 열어둔 채 책상 앞 오크나무 의자에 차분히 앉아 있었다.

석조 벽면에 박힌 마도 온도 조절 아티팩트가 서늘한 밤공기를 쾌적하게 덥혀주고 있었다.

은은한 마도 램프 불빛 아래.

레나가 건네준 아카데미 약도와 도서관에서 빌려온 기초 오클 응결 서적을 훑어보는 중이었다.

방 한구석, 옷장 옆 그림자 깊숙한 곳.

천으로 꽁꽁 싸맨 붐크레프트가 소리 없이 잠들어 있었다.

현경은 서적의 페이지를 차분하게 넘기며 가슴 깊은 곳 지옥로의 정적을 느꼈다.

낮 동안 흑경 케이가 찍어준 붉은 영식 인장 덕분에 편입 시험장 검사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추천 서류 복사본.

그 중앙에 선명하게 새겨진 붉은 인장 표면에는 여전히 케이의 아득한 마력 잔향이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천 뭉치 하나로 붐크레프트를 감싸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동음이나 마력 잔향은 천 뭉치를 뚫고 은연중에 흘러나오기 마련이었다.

아카데미 고위 학과장들이나 뛰어난 감각을 지닌 고위 마법사들이 가까이 접근한다면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챌 터였다.

현경은 책상 위 깃펜을 조용히 만지작거리며 창밖을 건너다보았다.

아카데미 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마도 실험실이나 강의실 등 수많은 오클러들과 접촉하게 될 터였다.

그 안에서 붐크레프트를 가방이나 천에 싸서 들고 다닐 수는 없었다.

기사들이나 오클러들에게 무기 검집은 신체의 일부와도 같았다.

검집이 없다면 검을 제대로 차고 다니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테리우스의 기억 속 수메르로 기사단 역시 고유의 기물 검집을 훌륭하게 갖추고 있었다.

사락-

그때, 닫혀 있던 아치형 창문 틈새로 서늘한 밤바람이 밀려들었다.

바람과 함께 떨어진 소리 없는 그림자.

달빛을 등지고 창틀 위에 가볍게 내려앉은 인물이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우아하게 빛나는 은발.

얼음처럼 서늘하고 매혹적인 눈동자.

뒷골목과 밤의 세계를 지배하는 지배자, 카이론(Chiron)이었다.

"기숙사 방이 제법 정갈하군, 키안."

카이론이 창틀에서 내려서며 건조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발소리조차 나지 않는 완벽한 기척 제어였다.

현경은 서류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고개를 들어 카이론을 무심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통금 시간에 3층 창문으로 들어오는 게 귀족의 인사인 모양이군."

"경비 골렘 따위의 눈을 피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지."

카이론은 가볍게 입꼬리를 올리며 현경의 방 한구석 shadow 공간을 흘끗 쳐다보았다.

장롱 옆에 숨겨진 붐크레프트의 천 뭉치.

카이론의 붉은 눈동자가 정교하게 빛났다.

"붐크레프트를 아주 조심스럽게 모셔두었군."

"아카데미 안이다. 드러낼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니까."

"훌륭한 판단이다. 하지만... 천으로 감싸두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지."

카이론이 품 안에서 검은 비단 장갑을 꺼내 끼며 묵직한 말을 던졌다.

"붐크레프트의 붉은 룬과 마력 응결 잔향은 생각보다 깊다. 아카데미 상층부나 오클러 학과장 같은 고위 인사들이 가까이 다가오면 천 뭉치 따위는 단숨에 뚫어볼 터."

현경의 눈매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카이론이 나직하게 미소를 지었다.

"붐크레프트가 본래 제 모습을 온전히 은닉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다. 바로 그것의 전용 검집(Dedicated Scabbard)이다."

"전용 검집?"

"과거 고대 수메르로의 명장 붐크레프트가 이 검을 제련할 때, 검의 강렬한 마동음과 붉은 룬 잔향을 완벽하게 억누르기 위해 함께 제작했던 특수 아티팩트 검집이지. 수메르로 멸망 당시 암시장으로 흘러들어 가 행방이 묘연했었다."

카이론이 품 안에서 붉은 아티팩트 양장지 한 장을 꺼내 현경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아르카눔 지하 암시장에서 발행된 최고급 비밀 경매 카탈로그였다.

카탈로그 중앙에 그려진 검은 룬 문양의 검집 도면.

'붐크레프트 전용 검집 - 봉인의 검집.'

현경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반응했다.

"이게 오늘 밤 경매에 나온다는 건가."

"그렇다. 아르카눔 지하 비밀 경매장 '아르카눔 시크릿 엑스체인지'. 제국 상층부 몰래 고대 아티팩트와 희귀 기물이 거래되는 곳이지."

카이론이 창밖의 밤하늘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오늘 밤 12시. 그곳에서 붐크레프트의 전용 검집이 경매에 올려진다. 그 검집을 얻어 검을 꽂아 넣는 순간, 붉은 룬과 오클 잔향은 완벽하게 봉인되어 평범한 철검처럼 보이게 될 거다."

현경은 책상 위의 카탈로그를 바라보았다.

붐크레프트를 제대로 가리고 아카데미에서 정체를 숨기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기물이었다.

검집이 없다면 아카데미 내에서 붐크레프트를 소지하는 것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것과 같았다.

"안내하겠다는 뜻인가?"

"물론이다. 흑경 님과의 약속도 있고... 나 역시 그 검집이 귀족 가문 놈들의 손에 들어가는 꼴은 보고 싶지 않으니까."

카이론이 은빛 창틀 밖 어둠을 가리켰다.

"어떻게 하겠나, 키안? 통금 경비 골렘을 뚫고 밤의 아르카눔으로 내려갈 준비가 되었나?"

현경은 장롱 옆 그림자 속 붐크레프트를 집어 들었다.

두꺼운 검은 겉옷을 걸치며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 출발하지."

카이론의 입꼬리가 짙게 올라갔다.

두 사람은 밤의 바람을 타며 3층 창문 밖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몸을 던졌다.

아카데미 순찰 골렘들의 거대한 기계음이 발밑을 스쳐 지나갔다.

밤하늘을 이스듬히 가르는 결계 장막 아래.

현경과 카이론의 그림자가 어둠 속으로 스며들듯 빠르게 자취를 감추었다.


아르카눔 지하 금제 구역.

상층부의 화려한 석조 다리와 푸른 결계 빛이 닿지 않는 어두운 수로 입구.

카이론이 묵직한 구리 빗장을 비틀어 잡자 수로 벽면이 소리 없이 돌아갔다.

지하 비밀 경매장으로 이어지는 은밀한 통로였다.

카이론은 품 안에서 흑룡 인장이 새겨진 최고급 VIP 통행패를 꺼내 들었다.

통행패를 확인한 거구의 가면 경비병들이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입구를 비켜섰다.

어둠 속에서 자줏빛 마도 램프 불빛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검은 가면을 쓴 가드들과 희귀 아티팩트를 노리는 귀족들의 기척이 나직하게 느껴졌다.

현경은 겉옷 품 속 붐크레프트를 나직하게 다잡았다.

검집을 손에 넣기 위한 밤의 경매가 막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지하 복도를 지나며 카이론이 나직한 음성으로 현경에게 경고를 건븸었다.

"오늘 경매장에는 제국 굴지의 아티팩트 상인들뿐만 아니라 귀족 가문의 비공식 대리인들도 여럿 참석했다."

"그들이 붐크레프트의 전용 검집의 가치를 알고 있는 건가?"

"그놈들은 고대 수메르로의 특수 합금 아티팩트 정도로 알고 있을 거다. 하지만 희귀성이 높은 만큼 경쟁이 치열할 테지."

현경의 눈빛이 차분하게 서늘해졌다.

경매장 안으로 들어서는 현경과 카이론의 가면에 자줏빛 마도 조명이 은은하게 번졌다.

붐크레프트를 완벽히 봉인할 검집을 손에 넣기 위한 심야의 서막이 열리고 있었다.

카이론이 건넨 은빛 입체 가면에 붉은 아티팩트 인장이 아른거렸다.

지하 경매장 중앙 홀로 들어서자 무대 위 경매 진행자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퍼지고 있었다.

"다음 경매 기물. 고대 수메르로 유적지 지하에서 출토된 특수 마도 검집입니다!"

경매 무대 중앙의 붉은 융단 위.

검은 룬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진 둔탁한 검집 하나가 은은한 흑동빛 광채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현경의 어깨에 메어진 붐크레프트가 천 뭉치 속에서 작게 진동했다.

자기 검집을 감지한 묵직한 마동음이었다.

현경은 무심한 눈빛으로 경매 무대 중앙의 검집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반드시 손에 넣어야만 하는 기물이었다.

경매장의 서늘한 자줏빛 마도 조명 아래.

가면을 쓴 수많은 귀족 대리인들이 경매표를 번쩍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100만 오클!"

"150만 오클!"

순식간에 호가가 치솟았다.

알라릭 백작 가문의 대리인이 손을 들어 올려 220만 오클을 불렀다.

현경은 품 안의 붐크레프트를 살며시 누른 채, 카이론을 향해 고개를 덕였다.

이 검집은 다른 누구에게도 넘겨줄 수 없었다.

카이론이 서늘하게 웃으며 검은 비단 장갑을 낀 손으로 경매 번호판을 높이 들어 올렸다.

"300만 오클."

압도적인 액수.

경매장 안의 귀족들과 아티팩트 상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은빛 가면을 쓴 카이론과 현경에게 쏠렸다.

지하 비밀 경매장의 팽팽한 열기 속에, 붐크레프트 전용 검집의 쟁탈전이 카이론의 묵직한 호가 하나로 순식간에 정돈되고 있었다.


"300만 오클 나왔습니다! 더 이상 없으십니까?"

경매 진행자의 묵직한 망치 소리가 지하 홀 전체에 울렸다.

상층부 VIP 관람석의 몇몇 귀족 대리인들이 카이론의 은빛 가면과 묵직한 기척을 주시하며 나직하게 혀를 찼다.

"카이론 상회의 비공식 대리인인가..."

"쯧, 굳이 저 마도 검집 하나에 300만 오클을 지불하려 들다니."

경매 망치가 둔탁한 소리를 냈다.

탕-! 탕-! 탕-!

"낙찰입니다! 300만 오클에 봉인의 검집은 17번 참가자에게 낙찰되었습니다!"

경매 요원이 검은 비단으로 덮인 붐크레프트 전용 검집을 들고 경매장 뒷편 인수 창구로 이동했다.

현경과 카이론은 무심한 발걸음으로 결제창구로 향했다.

카이론이 수표에 흑경 가문의 마도 인장을 쿵 찍어 결제를 마쳤다.

인수받은 검은 룬 문양의 전용 검집.

현경은 묵직한 검집을 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검집 표면에 새겨진 고대 수메르로 룬 문양이 현경의 손끝에서 온기를 발하고 있었다.

"이제 붐크레프트를 검집에 꽂아 넣을 차례다."

카이론이 서늘하게 한마디 던졌다.

현경은 천 뭉치를 풀고, 붉은 룬이 피어오르던 붐크레프트를 전용 검집 속으로 천천히 밀어 넣었다.

스르륵- 찰칵-!

검과 검집이 하나로 결합되는 순간.

검신 전체를 감싸고 있던 붉은 마동음과 잔향이 흔적도 없이 사그라들었다.

어깨에 둘러멘 검집은 이제 그저 묵직하고 평범한 고풍스러운 철검처럼 보이게 될 뿐이었다.

"완벽하군."

카이론이 미소를 지었다.

현경은 검집에 납도된 붐크레프트를 허리춤에 묵직하게 고쳐 차며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첫 목적을 달성한 밤이었다.

두 사람은 아르카눔 지하 수로 통로를 따라 아카데미 외곽으로 신속하게 돌아왔다.

기숙사 3층 창문으로 조용히 담을 넘어 들어선 현경.

카이론은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며 손을 일별해 보였다.

"내일 아침 전공 수업에서 보지, 키안."

"그래."

현경은 창문을 닫고 빗장을 잠갔다.

허리춤에 차가운 묵직함으로 자리 잡은 붐크레프트.

이제 어떤 마법사나 오클러도 이 검이 지닌 참혹한 힘과 수메르로의 유의를 한눈에 알아채지 못할 터였다.

현경은 검집을 쥔 채 조용히 검을 뽑았다가 다시 꽂아보았다.

쉬익- 찰칵-!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물려 들어가는 수메르로의 아티팩트 감각.

현경은 방 중앙에서 허리를 나직하게 낮추고 테리우스의 기체 체술 보법을 조용히 다듬었다.

마력을 배출하지 않으면서도 온몸의 신체 중심축을 완벽하게 다스리는 기체 감각.

가슴속 깊이 억눌린 지옥로의 정적과 허리춤의 묵직한 검집.

현경은 침대 옆 오크나무 의자에 앉아 검집 표면의 수메르로 룬 문양을 조용히 쓸어내렸다.

아카데미라는 정글 속에서 신분을 숨긴 채 힘을 기르는 첫 무대가 완전히 마련되었다.

내일부터 시작될 카오스포지 아카데미에서의 본격적인 전공 수업과 아카데미 생활.

현경은 책상 위 마도 램프의 푸른 불빛을 조용히 꺼뜨렸다.

창밖으로 쏟아지는 아르카눔의 은빛 달빛 아래.

어둠 속에 휩싸인 방 안에서 현경의 눈빛이 밤하늘의 별빛처럼 서늘하고 날카롭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다음 — 24화 : 첫 전공 수업과 선명한 존재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