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불청객과 동행

케이의 설명을 통해 떠오른 기억은 잔인할 정도로 선명했다.

우연찮게 조폭들의 위협에서는 벗어났지만, 결국 더 끔찍한 존재에게 붙잡혔던 것이다. 악마에게 빌었던 소원. 여동생만은 구해달라는 절박한 외침. 케이는 그 소원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루어 주었다. 비록 그 과정이 잔혹했고, 결과적으로 6년이라는 시간을 갈라놓았지만, 그와 동생은 살아남았다. 분노와 감사가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현경의 내면에서 소용돌이쳤다.

"결과적으로 너희는 위협에서 벗어났지. 하지만 헬켈베로스의 뱃속에서 겪은 영혼의 고통은 너희의 기억 일부를 날려버렸을 거다. 특히 그 직전의 기억은 더욱."

케이가 말을 이었다.

"게다가 다시 이 차원으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이변이 발생했다. 시공의 폭풍에 휘말린 거지. 그 결과 네 여동생은 먼저 이곳에 무사히 도착했지만, 너는 시간의 뒤틀림에 휘말려 6년이라는 세월 후에야 이곳으로 올 수 있었다."

현경은 꽉 쥐고 있던 주먹을 부들거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과거에 얽매여 있을 시간이 없었다. 당장 눈앞의 현실을 직시해야만 했다.

"대체 뭐 때문에 그런 짓을... 당신은 나를 이용해서, 뭘 하려는 거지?"

현경의 질문에 케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마치 현경의 영혼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는 듯, 차갑게 빛났다.

"그것도 때가 되면 알게 될 거다."

단호하고 냉정한 거절.

더 이상의 질문은 무의미하다는 듯, 케이는 허공에서 검 한 자루를 꺼내 현경에게 건냈다. 지옥로에서 테리우스의 기억 속에 그와 언제나 함께 있던, 수메르로의 수호 기사가 마지막 순간까지 손에 쥐고 있던 바로 그 검, 붐크래프트였다.

"지금 네게 다른 것들은 이르겠지. 우선 이것부터 받아라."

케이가 말했다.

"테리우스의 힘과 기억을 이어받은 너라면, 다루는 데 익숙할 거다."

현경은 망설임 끝에 검을 받아들었다. 손잡이를 쥐는 순간, 놀랍도록 익숙한 감각이 온몸을 감쌌다. 마치 오랫동안 자신의 몸의 일부였던 것처럼 손에 착 감겼고, 검날에서는 테리우스의 강직한 의지마저 느껴지는 듯했다. 잠시 눈을 감자, 검을 휘두르는 기사의 모습과 푸른 에너지 점들이 허공을 수놓는 광경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너희는 곧 아카데미로 가야 한다."

케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여전히 감정 없는 목소리였다.

"아카데미? 거긴 왜..."

"이유는 묻지 마라."

케이가 이번에도 현경의 말을 차갑게 잘랐다. 레나를 대할 때와는 명백히 다른 온도 차. 현경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자신들을 멋대로 이곳에 데려와, 일방적으로 정보를 차단하고, 이제는 행선지까지 명령하는 이 오만한 태도를 참을 수 없었다.

"웃기지 마! 당신 멋대로 우리를 끌고 와놓고, 이제 와서 명령이야! 우리가 왜 당신 말을 들어야 하지?"

현경이 분노를 터뜨리며 케이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하지만 케이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저 가볍게 손짓했을 뿐인데, 보이지 않는 벽이 현경을 짓누르는 듯한 압도적인 위압감이 온몸을 덮쳤다. 숨이 턱 막히고, 온몸의 근육이 경직되었다. 저항은커녕, 서 있는 것조차 버거웠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다시 한번 뼈저리게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케이는 아무 말 없이, 바닥에 검은 구슬 하나를 던졌다. 루시퍼를 소환하는 오브였다.

"그걸 타고 출발하면된다. 얼마나 여기에 머무르건 상관없다. 어차피 그 몸에 적응할 시간은 필요할테니. 준비가 되거든 알아서 출발해라. 그 이후의 지시는 나중에 다시 내리겠다."

케이는 그 말만 남기고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오두막 안으로 사라졌다.

"케이 님...!"

레나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은 없었다.

굳게 닫힌 문만이 남매를 맞이할 뿐이었다.

차가운 거절만이 담긴 굳게 닫힌 문. 레나의 애타는 목소리는 허공에 흩어졌다. 오두막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고요했다.

한동안 남매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레나는 여전히 문 쪽을 바라보며 안타까움과 혼란이 뒤섞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따스했던 케이의 모습과 지금의 냉담한 태도 사이의 간극을 이해하기 어려운 듯했다.

현경은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애써 쥐었다. 케이의 일방적인 통보와 압도적인 힘의 차이에서 오는 무력감, 동생 앞이라 터뜨리지 못한 분노가 속에서 들끓었다.

'젠장...' 속으로 욕설을 삼켰다.

자신들을 멋대로 이곳에 데려와 놓고, 이제는 가야 할 길까지 멋대로 정해 버리고 통보하는 오만함.

하지만 그에 어울리는 압도적인 힘과 온몸으로 느꼈던 그의 위압감을 떠올리니, 함부로 반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의 힘 앞에서는 저항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검, 붐크래프트. 케이가 말했듯, 잡는 순간부터 이상할 정도로 손에 익숙했다. 마치 오랫동안 함께 해온 것처럼. 검날에서 느껴지는 강직한 기운은 테리우스라는 기사의 기억과 맞물려 현경의 마음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지...'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답을 해줄 사람은 이미 문 너머로 사라진 후였다.

"오빠..."

레나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현경을 불렀다. 그녀의 목소리에 현경은 들끓던 감정을 억지로 누르고 동생을 돌아보았다.

"오늘은 일단 여기서 좀 쉬면서 몸부터 추스르는 게 좋겠어. 그... 머리색도 그렇고, 아까부터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괜찮은 거야?"

레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현경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글쎄... 괜찮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의 목소리에는 억눌린 분노와 깊은 피로감이 뒤섞여 있었다. 케이의 오만한 태도와 일방적인 명령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지만, 동생 앞에서까지 날을 세우고 싶지는 않았다.

"...케이 님 말이야. 왜 갑자기 오빠한테는 그렇게 차갑게 대하시는지..."

레나가 말을 흐렸다. 그녀 역시 케이의 극명한 온도 차이를 느꼈지만, 오빠처럼 노골적인 적대감을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이면에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내가 알 바 아니지! 그놈이 뭘 하든, 어떤 꿍꿍이가 있든 상관 없어. 중요한 건 우리를 멋대로 이곳에 끌고 왔다는 거고, 이제는 어디로 가라고 명령까지 한다는 거야! 내가 왜 그 놈 말을 들어야 하는데!'

현경은 속으로 들끓는 분노를 간신히 억눌렀다.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그는 애써 표정을 갈무리하며 짧게 대답했다.

"글쎄..."

그 한마디에 담긴 차가움과 분노의 편린만으로도 레나는 오빠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오빠, 그래도 진정해..."

레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현경의 팔을 잡으며 달랬다.

"하지만... 케이 님이 마냥 나쁜 분 같지는 않았어. 6년 전에 내가 오빠랑 막 해어지고 힘들었을떄... 따뜻하게 대해주셨고, 우리를 구해준 것도 사실이잖아."

현경은 레나의 말에 잠시 침묵했다. 그녀의 시선에는 여전히 케이에 대한 일말의 믿음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현경은 그 순수함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현경은 마지못해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결과 우리가 6년이나 떨어져 지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그리고 그자가 왜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왔는지, 뭘 원하는지도 모르고."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피로와 경계심이 묻어났다.

"아카데미... 그것 역시 그자의 계획 중 하나일 뿐일지도 몰라. 섣불리 믿고 따르기보다는,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야 해. 우리 스스로 상황을 파악하고 길을 찾아봐야 하지 않겠어? 언제나 그래왔듯이."

현경은 잠시 말을 멈추고 굳은 결의를 다졌다.

"...다시는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을 힘을 지녀야해."

현경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분노는 여전했지만, 그의 눈빛엔 명확한 목표 의식이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오빠, 케이 님도 몸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셨잖아."

레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현경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오늘은 일단 여기서 좀 쉬면서 몸부터 추스르는 게 좋겠어. 오빠 상태도... 온전해 보이진 않아."

레나의 말에 현경은 잠시 자신의 몸 상태를 돌아보았다. 부활 직후라 그런지 확실히 아직 몸이 완벽히 제어된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게다가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스쳐 지나가는 테리우스의 기억들까지. 그에겐 확실히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 그러자."

현경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남매는 오두막 근처의 쓰러진 나무에 다시 걸터앉았다. 어색한 침묵이 잠시 흘렀다. 현경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감정을 정리하려 애썼고, 레나는 그런 오빠를 안쓰럽게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오빠... 내가 그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지 않아?"

레나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현경은 그제야 레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6년. 자신에게는 불과 며칠 전의 기억 같은데, 동생은 그 긴 시간을 다른 세계에서 보냈다.

"...당연히 궁금하지. 말해줘. 어떻게 지낸 거야?"

현경은 감정을 억지로 누르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응... 정말 많은 일이 있었어."

레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처음 이곳에 떨어졌을 때는... 정말 너무 무섭고 외로웠지. 오빠도 없이 혼자... 아, 그리고 여기서는..."

레나는 살짝 뺨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

"...다들 나를 레나라고 불러. 케이 님이... 지어주신 이름이야."

그 말에 현경의 미간이 순간 희미하게 찌푸려졌다. 동생의 이름... 케이가 지어줬다는 사실이 어딘가 마음에 걸렸지만, 그는 복잡한 생각을 애써 누르며 다시 레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지금은 동생의 이야기에 집중해야 했다.

"아무튼... 그땐 매일 울기만 했던 것 같아."

레나의 목소리가 살짝 잠겼다.

"오빠 생각만 나고, 내가 너무 작고 쓸모없게 느껴졌지."

"그러다... 용기를 내서 케이 님께 물었어. 오빠를 다시 만나려면, 오빠에게 힘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그때 케이 님이... 내가 가진 힘을 일깨워주셨어. 마법사로서 강해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거야. 오빠 곁에 당당히 서고 싶어서, 더는 짐이 되고 싶지 않아서... 정말 필사적으로 배웠어."

레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케이 님 도움으로 3년 정도 마법 기초를 배우고, 그 다음엔 카오스포지 아카데미라는 곳에 들어갔어. 신트락스 제국에서 가장 좋은 곳이래. 거기서 많은 경험을 쌓고 마법 외에도 여러가지를 2년 정도 더 배우면서... 성장할 수 있었어. 이제 2학년 초반이야. 지금은 초 학기 끝나고 방학이고."

현경은 묵묵히 레나의 이야기를 들었다. 마법사, 아카데미, 제국...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6년이라는 시간 동안 훌쩍 성장해버린 동생의 모습이었다. 어리고 여리기만 했던 아이가 이제는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고 있었다.

"...대단하네, 너."

현경이 진심으로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대견함, 미안함, 그리고 낯설음.

"헤헤, 오빠도 아카데미에 가면 금방 적응할 거야! 신입생으로 시작해야겠지만."

레나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웃는 레나의 모습에 현경은 잠시 마음이 풀리는 듯했지만, 이내 자신의 상태를 떠올리며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그래서... 오빠는 괜찮은 거야? 아까부터 뭔가... 오빠한테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져. 검은 색으로 변한 머리색도 그렇고... 케이 님 말처럼 몸이 아직 불안정한 거야?"

현경은 설명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는 붐크래프트를 천천히 내려놓고 레나를 마주 보았다.

"헬켈베로스라는 괴물... 그 뱃속에서 깨어났을 때, 나 혼자가 아니었어."

현경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테리우스라는 기사가 있었지. 수메르로라는 도시의 수호 기사였다고 하더군."

현경은 지옥로에서의 만남과 테리우스의 마지막 선택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가... 마지막 순간에 내게 자신의 힘과 기억을 넘겨줬어.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아직 온전히 내 다룰 수 있는 게 아니야. 힘은 제멋대로 날뛰고, 내것이 아닌 기억들이... 마치 폭풍처럼 머릿속에서 뒤섞여서 뭐가 뭔지 제대로 알 수가 없어. 마치... 수많은 그림들이 눈앞에서 미친 듯이 빠르게 지나가는 파노라마 같달까."

현경은 자신의 머리를 가볍게 짚었다.

"이걸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고 제어하려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케이란 놈이 준 이 안경도 그걸 위한 거고. 그가 내게 기억을 맡기면서 부탁한게 있어. ...난 그 부탁을 외면할 수 없어."

현경의 설명에 레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오빠가 자신보다 더 끔찍한 경험을 했다는 사실, 그리고 여전히 위험한 상태에 놓여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랬구나. 오빠 혼자 얼마나 힘들었을까."

레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괜찮아, 오빠. 이제 혼자가 아니잖아. 내가 옆에 있을게. 우리 함께 천천히... 천천히 하면 돼. 나도 도와줄께." '...이젠 나도 무력하기만 하지 않아.'

레나는 그리 생각하며 현경의 손을 꼭 잡았다.

따뜻한 온기가 현경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전해지는 듯했다. 현경은 동생의 위로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 혼자가 아니었다. 서로에게 의지하며 이 낯선 세계를 헤쳐나가야만 했다.

다음 — 12화 : 잠시간의 적응과 휴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