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잠시간의 적응과 휴식
레나의 따뜻한 위로에 현경의 굳어있던 어깨가 조금씩 내려갔다.
여전히 케이에 대한 불신과 분노는 가슴 한구석에 응어리져 있었지만, 동생의 진심 어린 눈빛 앞에서 그는 잠시 무거운 감정을 내려놓았다. 그는 동생의 작은 손을 마주 잡으며, 쓰러진 통나무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래, 지금은 분노에 휘둘릴 때가 아니었다. 동생을 위해서, 그리고 이름 모를 세계에서 자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스러져간 기사, 테리우스의 마지막 부탁을 위해서라도 그는 다시 한번 의지를 다잡아야 했다.
"그래, 같이 해보자."
현경의 눈빛에는 혼란 대신 이전과는 다른, 차분하지만 강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그의 변화를 감지한 레나는 안심과 함께 오랜 기억 속 오빠의 듬직한 모습을 떠올리는 듯, 추억에 젖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아까 케이가 던져두었던 바닥의 검은 구슬을 재빨리 집어 들었다.
"이거, 오빠 거야."
레나가 오브를 현경에게 건네주었다. 매끄럽고 차가운, 살아있는 듯 미묘한 온기가 느껴지는 구슬의 감촉. 현경은 낯선 물건을 받아들며 물었다.
"이건 뭐지? 이것도 마법..의 도구 같은 거야?"
"이건 '소환 오브'라는 아티팩트야. 소환할 존재와의 계약이나 힘의 일부 같은 게 담겨 있어서, 이걸 매개로 불러낼 수 있는 특별한 아이템이지. 이걸로 '루시퍼'를 소환할 수 있어. 내 미카엘처럼, 오빠의 파트너가 되어줄 존재야. 엔젤페가서스 같은 건데... 음, 종류는 좀 다르려나? 케이 님은 '이면소환'이라는 특별한 방식으로 부르시더라. 솔직히 나도 자세한 건 잘 몰라. 케이 님만 아시는 비밀 같은 거야. 가끔 저렇게 알 수 없는 말씀을 하신다니까."
레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살짝 투덜거리듯 덧붙였다.
"말로만 하면 어려우니, 역시 직접 보여주는 게 빠르겠다. 오빠도 곧 익숙해질 거야."
그리고는 품에서 자신이 가진 하얀 오브를 꺼내 보였다. 현경의 것과는 달리 따스하고 부드러운 빛을 머금고 있었다.
"내가 먼저 시범을 보여줄게. 잘 봐!"
레나는 자신의 하얀 오브에 익숙하게 마력을 부드럽게 흘려 넣었다. 그러자 오브가 눈부시게 밝은 은은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오브를 허공에 가볍게 던졌다.
"나와줘, 미카엘!"
레나의 맑은 목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터져 나온 눈부신 빛이 사그라들자 순백의 털과 황금빛 갈기, 거대한 날개를 가진 페가서스가 위풍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발아래에는 복잡하게 그려진 푸른빛과 금빛이 어우러진 마법진이 빛나고 있었고, 주변에는 푸른 번개가 탁탁거리며 소용돌이치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순백의 날개와 몸통에는 은은하게 빛나는 푸른 룬 문양이 새겨져 있어, 마치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생명체임을 암시하는 듯했다. 이마에는 황금 고삐가 걸려 있고, 그 중심에 푸른 보석이 박혀 있었으며, 가슴에도 마찬가지로 황금 장식과 큰 푸른 보석이 달려 있었다. 그의 눈은 강렬한 푸른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더없이 신성하고 아름다운 자태. 주변의 공기마저 정화하는 듯한 기운을 뿜어내는 그것은, 그 이름도 유명한 신트락스 제국의 상징이자 로열 블러드, 엔젤페가서스 미카엘이었다. 현경은 그 압도적인 존재감과 아름다움에 잠시 숨을 삼켰다.
레나는 익숙하고 우아한 몸짓으로 미카엘의 등에 가볍게 올라탔다. 그리고 현경을 향해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
"자, 이제 오빠 차례! 그 오브에 마력을 주입하면서 던지고, 루시퍼의 이름을 부르면 돼! 어렵게 생각하지 마!"
현경은 레나의 말대로 검은 오브를 단단히 손에 쥐었다. 그는 심호흡하며 눈을 감고, 혼란스러운 기억의 파편 속에서 테리우스의 감각을 필사적으로 끄집어냈다. 마력을 다루는 법 그것은 그 기사의 기억. 아직은 희미하고 이질적인 감각이었지만, 그는 기억 속 테리우스가 그랬던 것처럼 오브에 자신의 의지와 마력을 집중시켰다. 그러자 손안의 검은 오브가 뜨겁게 달아오르며 희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마치 살아있는 심장처럼.
"나와라, 루시퍼!"
현경은 집중력을 쏟아부으며 기합과 함께 오브를 하늘로 던졌다. 검은 오브는 검붉은 섬광을 그리며 날아가더니, 미카엘이 나타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강렬하고 폭발적인 검붉은 빛과 함께 허공에서 터져 나갔다. 주변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는 듯한 위압감. 빛이 걷히자, 그 자리에는 미카엘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존재가 나타났다.
칠흑같이 검은 털과 불타는 듯한 붉은 눈동자, 거대한 검은 날개를 가진 페가서스가 앞발을 들어 올린 역동적인 포즈로 현경 앞에 나타났다.
그의 발아래에는 어두운 빨강과 보라색 에너지가 소용돌이치며 소환 포털처럼 빛나고 있었고, 주변에는 어두운 연기와 빛나는 입자들이 피어올랐다. 밝은 마젠타와 핑크색 번개가 탁탁거리며 그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순흑의 날개와 몸통에는 은은하게 빛나는 마젠타와 핑크색 룬 문양이 새겨져 있어, 마치 맥박 치는 마력 회로처럼 보였다. 그의 검은 갈기와 꼬리에도 같은 마젠타 에너지가 흐르고 있었다. 단순한 검은 고삐와 끈만 착용하고 있었고, 화려한 안장이나 갑옷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태어난 듯한 칠흑 같은 페가서스가 낮고 위협적인 포효와 함께 현경 앞에 내려섰다. 날카로운 눈매와 휘날리는 검은 갈기,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하고도 불길한 기운은 미카엘의 신성함과는 명백히 대조적인, 압도적인 위압감을 풍겼다.
루시퍼는 소환되자마자 현경의 앞에 내려와, 다른 모든 것을 무시한 채 오직 현경만을 바라보며 마치 오랜 시간 기다려온 주인을 만난 듯이 복종의 의미로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 붉은 눈동자에는 어떠한 적대감이나 경계심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깊은 충성심만이 느껴졌다.
'처음 만났는데, 왜 이렇게 당연하다는 듯이 나를 따르는 거지? 마치 원래 내 것이었던 것처럼... 테리우스의 기억 때문인가? 아니면 이것도 케이라는 놈이 뭔갈 해놓은 건가?'
현경은 순간 의아함을 느꼈지만, 지금은 깊이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그는 혼란스러운 생각을 애써 떨쳐내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경은 다시 한번 테리우스의 감각에 의지했다. 처음 타보는 말이었고, 루시퍼의 외형은 분명 위협적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몸은 마치 오랫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루시퍼의 등에 올라탔다. 미카엘처럼 화려한 안장은 없었지만, 등의 곡선이 몸에 꼭 맞춘 듯 편안했고, 안정적인 자세가 저절로 잡혔다.
"우와, 오빠 멋있다! 루시퍼도 엄청 강해 보이는데? 오빠랑 잘 어울려!"
미카엘 위에 앉은 레나가 눈을 반짝이며 진심으로 감탄하며 외쳤다. 그녀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미카엘을 이끌고 하늘로 휙 날아올랐다. 하늘에서 빙글, 우아하게 한 바퀴 크게 돌며, 마치 따라오라는 듯이 현경에게 손짓했다.
현경은 동생의 천진난만하고 장난스러운 태도에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6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동생의 이런 모습은 변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커버린 모습이 아직 조금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이런 평범하고 일상적인 순간이 긴장으로 굳어 있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놓이게 했다.
"좋아, 어디 한번 가볼까. 가자, 루시퍼!"
현경은 루시퍼의 검은 갈기를 가볍게 잡으며 아직은 어색하게 외쳤다. 그러자 루시퍼는 짧게 포효하며 동의하는 듯, 거대한 검은 날개를 힘차게 펼쳐 레나의 뒤를 따라 하늘로 맹렬하게 솟아올랐다. 처음 느껴보는 자유로운 비행 감각은 짜릿했다. 온몸을 감싸는 바람의 저항, 발아래 빠르게 멀어지는 숲과 오두막의 풍경. 현경은 테리우스의 기억 속 감각과 자신의 감각을 필사적으로 조율하며 점차 루시퍼와의 호흡을 맞춰나갔다. 처음에는 불안정했지만, 루시퍼는 현경의 미숙한 조종에도 놀랍도록 잘 반응해주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경쟁하듯 하늘을 누비며 비행 연습을 하는 사이, 어느덧 하늘은 붉은 노을로 물들고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다. 남매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다시 오두막 앞에 내려섰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현경은 루시퍼를 타는 데 제법 익숙해져 있었고, 테리우스의 감각과도 조금은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재밌었어, 오빠! 생각보다 훨씬 잘하는데? 역시 우리 오빠야!"
레나가 미카엘을 오브로 되돌리며 환하게 웃었다.
"이제 좀 쉬자. 내가 저녁 준비할게. 오빠는 먼저 씻을래? 땀 많이 흘렸잖아."
현경도 고개를 끄덕이며 루시퍼를 오브로 회수했다. 비행 연습은 생각보다 체력 소모가 컸고, 온몸이 땀으로 젖어 찝찝했다.
"그래, 먼저 씻을게. 부탁해."
"응! 저쪽이야. 편하게 써."
레나가 가리킨 곳은 오두막 한쪽의 평범해 보이는 작은 문이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서자, 현경은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겉보기와는 전혀 다른, 믿을 수 없을 만큼 넓고 깨끗하며 심지어 현대적인 시설까지 갖춰진 욕실이 나타난 것이다. 오두막에서 처음 나왔을 때부터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 이 작은 건물은 명백히 겉보기와 다른, 비정상적인 공간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도 없었으니, 이 또한 마법이나 케이의 특별한 능력의 결과일 것이다.
현경은 세계관이 뭔가 짬뽕된게 아닌건가 싶은 생각과 케이라는 존재에 대한 의구심이 다시 고개를 들었지만, 일단 생각을 접었다.
레나의 안내를 통해 욕실에 도착한 현경은 자신의 세계에서나 볼 법한 익숙한 형태의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몸을 푹 담갔다. 따뜻한 물이 비행으로 긴장했던 근육을 부드럽게 풀어주자, 잠시 잊었던 숨 막혔던 현실의 무게가 다시금 어깨를 짓눌렀다.
뜨거운 물이 몸의 긴장을 풀어주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현경의 머릿속은 더욱 복잡한 생각들로 들끓었다. 잠시 눈을 감자, 불과 며칠 전, 아니 이곳의 시간으로는 6년 전에 겪었던 끔찍한 사건들이 파노라마처럼 생생하게 재생되었다.
귓가에 아직도 검은 조직원들의 거친 숨소리와 추격하는 발소리가 맴도는 듯했다. 막다른 길에 몰렸을 때의 절망감, 동생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칼을 휘둘렀던 순간의 공포.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 속에서 악마에게 빌었던 어리석은 소원. '나를 희생해도 좋으니, 동생만은...' 그 직후, 마치 그 소원에 응답이라도 하듯 나타난 정체 모를 끔찍한 괴물들, 헬켈베로스. 지옥에서 기어 나온 듯한 흉측한 몰골의 그것들은 순식간에 조직원들을 찢어발겼고, 그 아비규환 속에서 동생을 데리고 도망치려던 찰나... 눈앞에서,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동생이 괴물에게 통째로 삼켜지던 그 순간의 충격과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던 무력감. 그리고 곧이어 자신마저 다른 괴물에게 삼켜지며 암흑 속으로 떨어졌던 기억.
잠시 잊었던 기억들이 이제는 그 모든 것이 너무나도 선명해 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헬켈베로스의 뱃속, '지옥로'라 불리는 끔찍한 공간이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영혼들의 고통스러운 비명, 살이 타는 역겨운 냄새, 온몸을 태우는 듯한 지옥불의 열기. 그 속에서 유일하게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기사, 테리우스와의 기이한 만남. 그는 자신을 '수호의 기사'라 칭하며, 알 수 없는 이유로 불타지 않는 현경에게 거래를 통해 자신의 힘과 기억, 그리고 영혼들의 구원이라는 부탁을 맡겼다. 거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거래와 약속.
현경은 그 무게를 고스란히 떠안은 채, 탈출을 시도했으나 결국 이변이 일어나 실패하여 지옥로의 가마솥에서 먹혀 한번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마주한 것은, 케이라는 정체불명의 남자였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오만한 태도, 속내를 짐작할 수 없는 차가운 붉은 눈동자, 그리고 첫 만남부터 압도적인 힘으로 자신을 짓눌렀던 위압감. 그는 현경을 '매개자'라 부르며, 마치 물건을 다루듯 이곳으로 데려왔다고 태연하게 설명했다.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준 것은 결과적으로 사실일지 몰라도, 그 과정과 방식은 결코 쉬이 납득하기 힘들었다. 모든 것이 그의 계획대로 흘러가는 듯한 상황, 일방적인 명령과 정보 차단.
현경은 케이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듯한 기분에 이를 악물었다.
무엇보다 현경을 가장 혼란스럽게 만든 것은 시간의 간극이었다. 자신에게는 불과 며칠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레나는 이미 6년이라는 긴 세월을 이 세계에서 보냈다고 했다. 12살의 어리고 여리기만 했던 동생은 이제 18살의 어엿한 숙녀가 되어, 마법을 배우고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었다. 훌쩍 커버린 외모는 물론이고, 말투와 행동, 세상을 대하는 태도까지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자신보다 한 살 많아진 나이도 어색했지만, 그보다 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6년이라는 시간 동안 동생이 겪었을 외로움과 슬픔, 그리고 그 곁에 자신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그 성장의 과정에 케이라는 남자가 깊숙이 관여했다는 점 역시 현경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너무나 달라진 동생의 모습 앞에서, 현경은 대견함과 미안함, 그리고 낯선 거리감을 동시에 느꼈다.
헬켈베로스, 지옥로, 테리우스, 케이, 6년의 시간차, 달라진 동생, 아카데미... 머릿속에서 수많은 정보와 의문, 감정들이 뒤엉켜 폭발할 것 같았다. 케이에 대한 분노와 불신, 동생에 대한 걱정과 애틋함, 테리우스의 힘과 기억에서 오는 혼란스러움,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한 불안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막막함까지.
모든 것이 뒤죽박죽되어 현경을 깊은 혼돈 속으로 몰아넣었다.
고민의 바다와 함께 욕실의 수면에 잠겨가던 현경은 복잡한 상념을 애써 떨쳐내듯 욕조에서 풀썩 일어났다.
지금은 끝없는 고민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몸을 추스르고, 테리우스의 힘과 기억에 익숙해지고, 레나와 함께 다가올 미래를 대비해야 했다.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욕실에서 나온 현경은 레나가 차려놓은 소박하지만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저녁 식탁 앞에 앉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평범한 식사의 온기였다.
"그 녀석... 아니, 케이란 놈은 같이 식사 안 하나? 늘 혼자 먹는 건가?"
현경이 그에게 묻고 싶은게 산더미 같았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슬쩍 물었다.
"응. 케이 님은 항상 혼자, 저기 자기 방에서 식사하셔. 가끔은 며칠씩 안 나오실 때도 있고... 아마 오빠에게 다시 지시를 내리시기 전까지는 만나기 어려울 거야. 원래 좀... 그러셔."
레나가 약간은 씁쓸한 표정으로 담담하게 대답했다. 케이의 부재는 그녀에게 너무나 익숙한 일상인 듯했다. 현경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물어봤자 레나가 알 리도 없을 테고, 괜히 동생의 기분만 상하게 할 뿐이었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식사를 하던 중, 레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오빠, 테리우스 님의 기억이랑 힘은... 좀 어때? 아까 비행하는 거 보니까 제법 익숙해진 것 같긴 한데... 괜찮은 거야? 몸에 무리는 없고? 온전히 다룰 수 있을 것 같아?"
현경은 잠시 포크를 내려놓고 생각에 잠겼다. 루시퍼를 타고 하늘을 날았던 감각, 테리우스의 기억 속에서 느껴졌던 힘의 편린들을 떠올렸다.
"글쎄... 감각으로는 대충 알겠는데, 아직 완전히 내 것처럼 자유롭지는 않아. 기억 속의 테리우스가 힘을 다루던 그 완벽한 느낌이랑, 내가 실제로 힘을 사용하려고 할 때랑은... 뭔가 좀 달라. 뭐랄까, 겉도는 느낌? 여전히 위화감이 느껴진달까. 내 몸인데 내 몸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테리우스의 힘과 기억은 분명 강력한 가능성을 품고 있었지만, 아직은 사이즈가 맞지 않는 빌려온 옷처럼 몸에 익숙하지 않았다. 잘못하면 폭주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마저 희미하게 느껴졌다.
"익숙해질 시간이... 꽤 필요할 것 같아. 테리우스 님이 부탁한 것도 있고, 제대로 다룰 수 있게 돼야 해."
"너무 조급해하지 마, 오빠."
레나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현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내일 나랑 같이 연습해보자! 기초적인 마력 운용이나 검술이라면 내가 아는 선에서는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어! 이래뵈도 나 아카데미 2학년이라고!"
레나가 일부러 씩씩하게 가슴을 펴며 눈을 빛내며 제안했다. 그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대견해서, 현경은 자신도 모르게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좋지. 부탁할게, 선생님."
"헤헤, 맡겨만 줘!"
어느덧 식사가 끝나고, 밤이 깊었다. 남매는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 잠자리에 들었다. 현경은 낯선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내일부터 시작될 새로운 하루과 고된 훈련을 조용히 다짐하며 비장한 마음으로 잠에 들었다.
그리고 레나는, 오빠와 함께할 내일을 기대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