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붐크레프트의 첫 울림
다음 날 아침, 현경은 익숙하지 않은 침대의 삐걱거림과 함께 눈을 떴다.
밤새 악몽에 시달리지는 않았지만, 몸은 여전히 완전히 자신의 것이 아닌 듯한 미묘한 위화감에 휩싸여 있었다. 마치 사이즈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한 어색함. 하지만 어제보다는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희미하게 남아있던 두통도 사라졌고,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테리우스의 기억 파편들도 한결 잠잠해진 듯했다. 어쩌면 이 몸과 기억에, 아주 조금씩이지만 적응해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오빠, 일어났어? 아침 준비 다 됐어!"
방문 밖에서 레나의 밝고 활기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젯밤 함께 훈련하기로 한 약속 때문인지 유난히 들떠 있는 것 같았다. 목소리 톤은 6년 전과 미묘하게 달라졌지만, 그 안에 담긴 설렘은 예전 그대로였다. 현경은 짧게 대답하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창밖으로 비치는 햇살이 낯설면서도 따스했다.
간단하게 차려진 아침 식탁에 마주 앉았다. 식탁 위에는 처음 보는 신기한 모양의 과일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빵, 그리고 향긋한 냄새가 나는 붉은색 차가 놓여 있었다. 과일은 반짝이는 보라색 껍질을 가지고 있었고, 빵은 보기보다 폭신해 보였다.
"우와, 이거 다 네가 준비한 거야? 대단한데, 우리 동생 다 컸네."
현경은 일부러 과장된 칭찬을 하며 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고소하면서도 은은한 단맛이 입안에 퍼졌다. 속으로는 케이라는 정체불명의 인물에 대한 경계심과 자신의 불안정한 상태에 대한 걱정이 여전히 안개처럼 남아 있었지만, 애써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어젯밤부터 훈련 생각에 들떠 재잘거리는 동생 앞에서까지 어두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헤헤, 당연하지! 오빠랑 같이 훈련할 생각하니까 어젯밤부터 신나서 잠도 설쳤다니까! 오빠, 오늘은 내가 확실하게 기초부터 가르쳐줄게!"
레나는 자신만만하게 가슴을 폈다. 그 모습이 예전의 겁 많던 동생과는 사뭇 달랐지만, 어딘가 모르게 옛모습이 겹쳐보이는 귀여운 모습에 현경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오, 그래? 우리 동생, 이제는 마법 선생님도 되는 건가? 잘 부탁해, 레나 선생님."
"치, 놀리지 마! 나 그래도 아카데미 2학년이라고! 마법에 관해서는 오빠보다 훨씬 선배거든?"
레나가 살짝 입술을 삐죽였지만, 눈빛은 장난기로 반짝였다. 현경은 그런 동생의 모습에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지금은 복잡한 생각은 잠시 접어두자. 케이가 어떤 꿍꿍이든,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든, 지금 이 순간은 동생과의 시간에 집중하는 것이 먼저였다. 동생의 저 밝은 미소가 그의 얼어붙은 마음을 조금씩 녹여주는 듯 했다.
"자, 그럼 시작해볼까?"
식사를 마치고 오두막 근처의 넓은 공터로 나오자, 레나가 비장한 표정으로 팔을 걷어붙였다.
"우선은 마력 운용부터 시작하자. 모든 마법의 기본이니까. 몸 안의 에너지를 느끼고, 그걸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연습이야."
레나는 자신이 아는 기초적인 마력 운용법과 감각 훈련법을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아카데미에서 배운 듯한 체계적인 설명은 명료했고, 직접 보여주는 시범은 제법 능숙했다. 하지만 현경은 레나가 말하는 방식의 마력 흐름에 어색함을 느꼈다. 마치 정해진 공식에 따라 억지로 힘을 밀어 넣는 듯한 감각. 몸 안의 힘을 그런 식으로 순환시키는 감각 자체가 이질적이었다. 오히려 눈을 감고 테리우스의 기억에 집중했을 때 느껴지는, 훨씬 더 강하고 직관적인 힘의 흐름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혈관을 따라 흐르는 피처럼, 몸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자연스러운 순환.
'레나가 말하는 건... 아카데미에서 가르치는 정석인가? 뭔가 너무 정형화되어 있는 느낌인데. 테리우스는 이렇게 하지 않았어. 훨씬 더... 본능적이고 거칠었지만 효율적이었지.'
현경은 처음에는 레나의 방식을 따르려 애썼다. 하지만 몸이 거부하는 듯한 이질감에 이내 포기하고, 자신의 감각과 테리우스의 기억을 조합하기 시작했다. 레나의 설명에서 이론적인 뼈대를 잡고, 그 위에 테리우스의 실전 경험에서 우러나온 감각을 덧입히는 방식이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몸 안의 힘이 훨씬 부드러우면서도 강력하게, 마치 제 길을 찾은 강물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현경은 자신의 본능과 기억 속 경험을 조율하며 순식간에 마력 운용의 기본적인 감각을 터득해나갔다. 이것이 케이가 말한 '매개자'의 능력, '기질'의 편린일지도 몰랐다. 타인의 경험을 단순히 모방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고 재창조하는 능력.
"어? 오빠, 벌써? 굉장해! 그렇게 자연스럽게 마력을 순환시키다니! 내가 처음 배울 땐 며칠이나 걸렸는데!"
레나는 현경의 비범한 습득 속도와 예상외로 안정적인 마력 흐름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처음에는 마력이 조금 거칠게 요동치는 듯 보였지만, 현경은 그것을 금세 다듬어 자신만의 리듬으로 안정화시켰다. 마치 숙련된 조율사처럼. 레나는 감탄하며 속으로 외쳤다.
'역시 우리 오빠야! 뭔가 특별한 게 있는 줄 알았다니까! 아카데미 교수님들이 봤으면 깜짝 놀라셨을 거야!'
예상치 못하게 기초적인 마력 운용 훈련이 순식간에 끝나자, 현경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 붐크레프트를 천천히 꺼내 들었다.
검은 생각보다 묵직했지만, 손잡이를 쥐는 순간 놀랍도록 손에 착 감겨왔다. 마치 오랫동안 함께 해온 자신의 일부처럼. 그리고 그 순간, 어제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선명하게 테리우스의 기억과 감각이 파도처럼 밀려들어왔다. 단순한 정보나 지식의 나열이 아니었다. 마치 자신이 직접 겪었던 것처럼, 검을 쥐었던 수많은 전투의 감촉, 칼날에 힘을 불어넣던 순간의 집중력, 그리고 심장을 터뜨릴 듯한 격렬함 속에서 심폭(心爆)을 터뜨릴 때의 감각까지 생생하게 느껴졌다. 검 손잡이에 남은 희미한 온기마저 느껴지는 듯했다.
현경은 자시 눈을 감고 그 감각의 파도에 몸을 맡겼다. 테리우스라는 한 기사의 삶과 경험이, 그의 투지와 고뇌가 현경의 의식 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우와... 그 검, 역시 보통이 아니네. 가까이만 가도 뭔가... 강한 힘이 느껴져. 케이 님이 주신 거라면 뭔가 특별한 아티팩트일 거야. 분명 붐크레프트라고 했지?"
레나가 붐크레프트를 신기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는 붐크레프트의 이름이나 능력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는 듯했다.
현경은 다시 눈을 뜨고, 테리우스의 기억을 바탕으로 붐크레프트에 자신의 힘을 천천히 주입하기 시작했다. 레나가 알려준 정형화된 방식과는 다른, 테리우스의 기억 속에서 느껴지는 독특하고 본능적인 방식으로. 검이 미세하게 진동하며 푸른 빛을 머금기 시작했다. 마치 그의 의지에 호응하듯.
팟! 파팟!
그러자 검 주변 허공에 희미했던 어제와 달리, 선명한 푸른 빛을 띤 작은 에너지 구체, '심폭' 몇 개가 불안정하게 깜빡이며 나타났다. 크기는 주먹보다 작았지만, 응축된 에너지가 느껴졌다. 현경은 자신의 의지대로 발현된 힘의 결과물을 보며 놀라움과 함께 짜릿한 가능성을 느꼈다.
"됐다!"
현경은 테리우스의 기억을 따라, 생성된 심폭들을 조작하여 특정 형태로 묶거나 원하는 방향으로 날려 보내려 시도했다. 하지만 머릿속의 영상과 실제 몸의 움직임 사이에는 아직 간극이 있었다. 처음 몇 번의 시도는 역시 서툴렀다. 심폭들은 불안정하게 흔들리다 힘없이 픽, 하고 흩어지거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 나무 기둥에 부딪혀 작게 터졌다. 마치 제멋대로 날뛰는 불꽃 같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실패를 거듭하며 힘을 사용할수록 오히려 심폭을 다루는 제어 감각이 점점 더 명확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힘을 조절해야 하는지, 어떻게 의지를 전달해야 하는지 몸이 저절로 깨닫는 듯했다. 마치...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현경은 다시 집중하여 심폭을 생성하고 조작했다. 실패를 통해 얻은 감각을 바탕으로 미세하게 힘의 흐름을 조절하고, 의지의 방향을 더욱 명확히 했다. 눈을 감고 심폭 하나하나의 존재를 느끼며, 마치 자신의 팔다리를 움직이듯 다루려 애썼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그는 마침내 허공에 여러 개의 심폭을 안정적으로 띄워 고정시키거나, 원하는 방향으로 부드럽게 날려 보내는 데 성공했다. 아직 테리우스처럼 독수리 형상을 만들거나 연쇄 폭발 같은 정교한 기술을 사용하는 것은 어려웠지만, 불과 몇 시간 만에 이룬 놀라운 발전이었다. 심폭들이 그의 의지에 따라 푸른 궤적을 그리며 공터를 날아다니는 모습은 제법 볼만했다.
"...말도 안 돼. 오빠, 그걸 벌써 저렇게 다룬다고?"
레나는 입을 떡 벌린 채 현경의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이것은 단순히 테리우스의 기억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현경 자신도 내심 놀랄 정도의 빠른 숙달 속도였다.
'확실히... 뭔가 달라. 내 안에 있는 무언가가, 테리우스 님의 힘과 기억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걸 넘어, 내 방식대로 소화하고 재창조하고 있는 느낌이야.'
동시에 현경의 머릿속에는 붐크레프트를 사용했던 테리우스의 경험이 마치 오래된 활동사진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그 기억 속 테리우스의 움직임과 심폭 활용 방식은 어딘가... 너무 정직하고 단조로웠다. 야수같이 맹렬하지만 그럼에도 교과서에 나올 법한 정석적인 움직임. 물론 강력했지만, 변화나 응용이 부족해 보였다. 현경은 자신도 모르게 미묘한 의문을 느꼈다.
'이 검, 분명 더 다양한 활용법, 더 창의적인 응용이 가능할 것 같은데... 왜 테리우스 님은 저렇게 한정적으로만 사용했을까? 기사라는 신분상에서 나오는 사고방식의 차이 때문인가...?'
현경의 머릿속에는 그가 원래 살았던 세계, 온갖 영화, 애니메이션, 게임 속에서 보았던 현란하고 창의적인 능력들이 스쳐 지나갔다. 힘을 단순히 방출하거나 정해진 형태로 만드는 것을 넘어, 상상하는 대로 형태를 바꾸고 예측 불가능한 효과를 만들어내는 기술들. 염동력처럼 물체를 움직이거나, 방어막을 치거나, 심지어는...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에너지를 변형시키는 것들. 어쩌면 이 '심폭'이라는 것도 그런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가진 게 아닐까? 테리우스는 강직하고 정직한 기사였기에 검의 물리적인 힘과 정석적인 운용법에만 집중했을 뿐, 사용자의 의지나 상상력에 따라 무궁무진하게 변형될 수 있는 붐크레프트의 본질적인 가능성을 미처 파악하지 못하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외면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폭발 설계자(Boomcraft)'라는 이름처럼, 어쩌면 이 검은 사용자가 직접 그 폭발의 형태와 방식, 더 나아가 에너지의 본질까지 '설계'할 수 있는 물건일지도 모른다.
그 의문과 생각은 현경의 내면에 새로운 가능성의 씨앗을 심었다. 테리우스의 길을 따르되, 그것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야 한다는 강한 동기 부여가 되었다.
붐크레프트 사용에 더욱 집중하자, 테리우스가 헬켈베로스와 최후의 전투를 벌이던 순간의 기억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졌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 폐허가 된 도시의 참상과 비명,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기사의 굳건한 의지, 그리고 붐크레프트를 마지막 순간까지 놓지 않았던 필사적인 공격들. 순간적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방대한 정보와 격류에 현경은 가벼운 현기증이 일었지만, 이전처럼 압도당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테리우스가 느꼈을 투지와 용기, 그리고 무력감과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는 고통에 잠식당하는 대신, 테리우스의 움직임 하나하나, 힘을 운용하는 방식과 타이밍, 극한의 전투 속에서의 판단들을 놀라운 집중력으로 꿰뚫어 보고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려 했다. 단순한 관찰이나 모방이 아니었다. 테리우스의 경험을 분석하고 이해하며, 자신의 잠재력과 결합시켜 시뮬레이션하듯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의 코에 걸쳐진 제어용 안경은 넘쳐나는 정보의 흐름과 격렬한 감정의 파도를 적절히 필터링하고 정돈해주듯 희미하게 빛을 발할 뿐, 어제처럼 불안정한 에너지를 억제하려는 격렬한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안경은 폭주를 막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인 동시에, 현경이 과부하 없이 정보를 받아들이고 처리하며 안정적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일종의 보조 프로세서 역할도 하는 듯했다.
"오빠, 괜찮은 거야? 또 안색이...!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레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달려와 그의 팔을 잡았다. 그녀의 손에서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하지만 현경은 괜찮다는 듯 부드럽게 손을 들어 보였다. 그는 고통스러워하기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감각에 눈을 뜨고 더 깊은 가능성을 발견한 듯한, 약간은 흥분된 듯한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반짝였다.
"아니, 괜찮아. 오히려... 뭔가 알 것 같아. 길이 보이는 것 같달까."
현경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훈련을 잠시 중단하고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숨을 골랐다. 시원한 바람이 땀을 식혀주었다. 레나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현경을 살폈다.
"정말 괜찮은 거야? 테리우스 님의 기억 때문에 힘들어 보이는데... 아까는 정말 집중해서 아무 말도 못 걸었어."
레나는 물병을 건네며 말했다.
"힘들다기보다는... 좀 낯설어서 그래."
현경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솔직하게 말했다.
"갑자기 너무 많은 정보와 감각이 들어오니까 정신이 없긴 한데, 이상하게 불쾌하거나 고통스럽진 않아. 오히려...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느낌이야."
"하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익숙해지고 있어. 그리고 테리우스 님의 기억은... 처음엔 부담스럽고 혼란스러웠지만, 오히려 큰 도움이 돼. 내가 뭘 해야 할지, 어떻게 강해져야 할지 알려주는 훌륭한 교본이자 내비게이션 같다고 할까."
"정말? 다행이다!"
레나는 그제야 안심하며 환하게 웃었다. 오빠의 얼굴에 드리워졌던 어두운 그림자가 조금 걷힌 것 같아 진심으로 기뻤다.
"역시 우리 오빠는 대단해! 그런 적응력이라면 아카데미에 가서 제대로 배우면 훨씬 더 강해질 수 있을 거야! 분명 모두를 놀라게 할 거라구!"
레나의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레나의 순수한 칭찬과 기대에 현경은 쑥스러우면서도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자신감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래, 할 수 있다. 테리우스의 마지막 부탁을 이행하고, 이 낯선 세계에서 자신과 동생을 지킬 힘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케이라는 존재는 여전히 마음에 걸렸지만, 그가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가 무엇이든, 일단은 강해지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것이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날의 훈련은 해가 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현경은 붐크레프트 사용을 통해 마력 운용과 심폭 제어 능력을 놀라운 속도로 향상시켰고, 테리우스의 전투 기술들을 몸에 익혔다. 동시에 자신의 특별한 적응 및 재현 능력의 존재를 어렴풋이 자각하게 되었다. 테리우스의 힘과 기억은 더 이상 불안하고 통제 불가능한 혼돈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경이 앞으로 나아갈 길을 비춰주는 등대이자, 그의 무한한 성장을 위한 귀중한 발판이었다.
노을빛이 길게 드리워진 공터를 뒤로하고 현경은 오두막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레나가 옆에서 오늘 있었던 훈련 성과에 대해 신이 나서 재잘거렸고, 현경은 피곤했지만 미소를 지으며 귀 기울였다. 그의 안에는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맹렬한 힘(헬켈베로스의 잔재, 변이된 지옥로)의 고동과,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검(붐크레프트)의 울림, 그리고 한 기사의 삶이 남긴 깊은 흔적(테리우스의 기억과 의지)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엮어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갈 것인가. 막연했던 불안감은 어느덧 가라앉고, 그 자리에는 심장을 뛰게 하는 미지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감,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여정에 대한 묵직한 결의가 차오르고 있었다.
어둠이 내려앉는 오두막의 창문 너머로 새어 나오는 불빛은, 이제 막 시작될 그의 새로운 이야기를 비추는 듯 희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