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새로운 여정, 아르카눔으로
그렇게 하루하루 훈련과 적응을 반복하며 어느덧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쏜살같이 흘렀다.
현경은 놀라운 속도로 새로운 몸과 테리우스에게서 받은 힘에 익숙해져 갔다. 헬켈베로스의 육체를 기반으로 재구성된 몸은 때때로 이질적인 감각을 일깨웠지만, 테리우스의 기억과 자신의 기질 덕분인지 마력 운용이나 붐크레프트 사용은 날이 갈수록 자연스러워졌다. 물론, 여전히 제어용 안경 없이는 불안정한 에너지가 폭주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적어도 일상생활과 기본적인 훈련에는 큰 지장이 없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그렇게 일주일째 되던 날 저녁 식사 후, 레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오빠, 이제 슬슬 아카데미로 출발해야 할 것 같아."
"음? ...벌써?"
현경은 놀라했다.
"아직... 네 도움 없이는 완벽하게 힘 조절도 제대로 못 하는데. 케이라는 작자는 얼굴 한번 안 비추고."
레나가 손가락을 치켜든다.
"힘 조절은 아카데미 가서 더 체계적으로 배우면 돼. 지금도 엄청 빠른 거야!"
이어서 차분한 톤으로 목소리를 낮추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1학기 이후 방학이 한 달인데, 벌써 2주가 지났어. 여기서 아르카눔까지 아무리 페가서스라도 꼬박 나흘은 가야 하니까, 시간이 빠듯해. 편입 준비도 해야 하고."
"편입이라..."
현경은 케이가 남긴 추천서를 만지작거렸다.
"케이... 그 사람은 대체 뭘까. 왜 우리를, 아니 나를 이렇게 데려와 놓고 설명 하나 없는 건지. 넌 그 자식이 믿을 만하다고 생각해?"
"...오빠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돼. 하지만 케이 님은... 우리, 아니 나한테는 적어도 은인이셔."
레나의 목소리가 조금 더 낮아졌다.
"전에도 말했지... 오빠를 만나지 못했던 시간 동안, 처음에 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거든. 그분이 아니었다면 난..."
그녀는 말을 잠시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물론, 가끔 이해하기 힘든 면도 있으시지만... 적어도 우리를 해치려는 분은 아니라고 믿어. 그리고 아카데미는 분명 오빠한테 큰 도움이 될 거야. 케이 님이 말하는 오빠의 그 특별한 힘... 그걸 제대로 이해하고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고."
현경은 레나의 눈을 바라보았다. 누누히 자각되는 바이지만, 6년의 시간은 동생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가 알던 어리고 여린 소녀가 아니었다. 케이에 대한 동생의 믿음이 마냥 순진하게만 보이지는 않았다.
"알았어. 네 말을 믿어볼게."
현경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데미, 가보자."
"정말?"
레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잘 생각했어, 오빠! 아르카눔 가면 진짜 할 거 많다! 오빠 교복 새로 맞추고, 훈련용 검이랑 보호구도 사고! 아, 시장에 파는 꼬치구이 진짜 맛있는데!"
"너 정말 먹을 거 얘기할 때 얼굴이 확 핀다."
현경이 피식 미소 지으며 말했다. 조금 전까지의 심각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었다.
"당연하지! 맛있는 건 중요하니까! 오빠도 먹어보면 반할걸?"
레나의 들뜬 모습에 현경의 마음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그래, 일단 가보자. 가서 부딪혀보는 수밖에.
"그래도 출발 전에 케이를 만나서 직접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역시 어렵겠지?"
레나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응... 케이 님은 한번 작업실에 들어가시면 기약이 없으셔서... 아마 우리가 출발하고 나서야 연락이 닿을지도 몰라. 일이 생기면 꼭 연락을 주실 거야."
"마냥 기다리기만 해야된다라... 일단, 알았어. 그럼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자. 짐은 같이 싸고."
다음 날 새벽, 동이 트기 전 남매는 오두막을 나섰다. 현경은 마지막으로 오두막을 돌아보았다. 짧지만 강렬했던 시간. 이곳에서 그는 뜻하진 않은 새로운 삶을 얻었다.
"루시퍼!" "미카엘!"
검은 페가서스와 하얀 페가서스가 새벽 공기를 가르며 나타났다. 현경은 이제 제법 익숙하게 루시퍼의 등에 올라탔다.
"자, 가자! 아르카눔으로!"
레나의 외침과 함께 두 마리의 페가서스는 힘차게 하늘로 솟아올랐다.
나흘간의 비행은 현경에게 또 다른 세상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산맥과 원시림, 광활한 초원을 지나며 그는 이 세계의 장대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숨겨진 위험을 동시에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발밑으로 펼쳐진 울창한 녹색 바다는 때로는 평화로워 보였지만,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공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둘째 날 오후, 특히 거대하고 험준해 보이는 산맥과 그 아래 펼쳐진 원시림 지대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와, 저 아래 숲 좀 봐, 오빠. 엄청 울창하지? 저기가 투바의 숲 중심이야."
레나가 옆에서 말을 걸었다.
"이 숲엔 엄청나게 생명력이 넘쳐서 그런지 신기한 식물도 많고 그리고 대신 그만큼 강력한 마물들도 많아서 조심해야 하는 곳이지."
"마물?"
현경은 긴장하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응. 그래도 미카엘이랑 루시퍼가 있으니 다행이지. 웬만한 땅 위의 마물들은 우리 속도를 따라오지도 못할걸?"
레나는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하늘을 나는 녀석들은 좀 성가실 수 있어. 뭐, 그래도 우리 페가서스들이 더 빠르니까 웬만하면 따돌릴 수 있을 거야."
레나가 안심시키듯 말을 덧붙이는, 바로 그 찰나였다.
아래쪽 울창한 숲 속 깊은 곳에서부터 섬뜩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우거진 나뭇잎 사이로 무언가가 폭발하듯 솟구쳤다.
검은 점들. 하나, 둘... 아니, 셀 수 없이 많은!
마치 굶주린 독수리의 머리와 파충류의 몸통을 끔찍하게 이어붙인 듯한 형체들이 검은 화살처럼 하늘을 향해 쏘아져 올랐다! 찢어진 가죽 날개가 퍼덕이는 불길한 소리.
눈 깜짝할 사이에 좁혀진 거리.
날카로운 갈고리 발톱과 번득이는 이빨, 탐욕스럽게 벌어진 턱. 그리고 그들을 꿰뚫는 듯한, 수십 쌍의 매서운 붉은 눈빛.
와이번호크 무리였다!
"오빠, 꽉 잡아!"
레나가 놀랐지만 순식간에 반응하며 소리쳤다.
와이번호크들은 순식간에 남매를 향해 사방에서 쇄도하며 포위망을 좁혀왔다. 살을 에는 듯한 바람과 함께 날카로운 발톱이 허공을 갈랐고, 귓가에는 놈들의 불길한 울음소리가 가득 찼다. 미카엘과 루시퍼는 본능적으로 울부짖으며 허공에서 몸부림쳤다.
'젠장, 이렇게 많을 줄이야!'
현경은 벌때같이 많은 수에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반사적으로 허리의 붐크레프트를 뽑아 들었지만, 테리우스의 기억 속 전투 경험이 아무리 풍부했어도,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공중에서의 실전 경험은 전무했다. 손에 쥔 검이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바로 그때, 레나의 다급한 외침이 현경의 귀를 때렸다.
"오빠, 위로! 포위되기 전에 빨리 상승해야 해!"
그녀는 순간적인 판단으로 적들이 상승 가능한 고도에 한계가 있을 것이라 판단하였다. 이를 바로 현경에게 소리쳐 알림과 동시에 미카엘의 고삐를 거칠게 잡아당기며 필사적으로 고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현경은 레나의 외침에 정신을 번쩍 차렸다.
포위망이 완성되기 직전, 그는 다급히 집중하여 마력을 끌어모아 붐크레프트 끝으로 허공에 빠르게 육망성을 그렸다. 지난 일주일간 집중했던 에너지 응축 수련을 바탕으로, 그 스스로 구상했었던 형태였다. 아직 미숙한 기술이었고, 공중에서 포위망을 향해 사용하는 것은 즉흥적인 판단이었지만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금빛 폭심의 육망성이 붐크레프트 끝에서 발현되어 떨어져 내렸고.
그의 호통과 함께 곧 강렬한 빛을 내뿜으며 터져나갔다.
"터져라!"
찰칵!
현경의 트리거를 누르며 외침과 함께 육망성 심폭이 뒤쪽으로 날아가 포위망의 한가운데서 폭발했다. 강력한 충격파와 섬광이 와이번호크 무리를 덮쳐 그들의 진형을 순식간에 흐트러뜨렸다.
"지금이야!"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레나가 미카엘을 최고 속도로 수직 상승시켰다. 현경 역시 폭발의 상승기류를 타고 루시퍼를 이끌며 빠르게 그 뒤를 바짝 따랐다.
두 마리의 페가서스는 와이번호크들이 따라오기 힘든 고도까지 순식간에 치솟았다. 아래쪽에서는 분노와 혼란에 빠진 와이번호크들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안심하기는 일렀다. 너무 급하게 고도를 높인 탓인지, 차갑고 희박한 공기가 폐를 찔렀다. 마법사인 레나는 마법 방비로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고도 변화와 아직 완전히 적응되지 않은 몸 때문에 현경은 숨쉬기가 훨씬 더 힘겨웠다. 가슴이 조여오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페가서스들은 고공에 익숙해 괜찮아 보였지만 현경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숨 막히는 고통을 참아내며 아래를 살폈다. 다행히 와이번호크 무리는 더 이상 추격해오지 않았고, 점처럼 작아져 있었다. 높은 고도에서 충분히 이동하여 안전거리를 확보했다고 판단한 후에야 레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현경에게 말했다.
"오빠, 이제 괜찮을 거야. 너무 높아서 숨쉬기 힘드니 조금씩 천천히 내려가자."
레나가 현경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녀 역시 숨이 가빴지만, 현경만큼 힘들어 보이지는 않았다.
현경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루시퍼를 조종하여 레나와 함께 숨쉬기 편한 고도까지 천천히 하강했다. 아찔한 위기 상황은 넘겼지만, 방금 전의 경험은 결코 이 세상이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각인시켜 주었다.
한참을 더 날아 마침내 험준한 산맥과 울창한 투바의 숲을 벗어나자, 눈앞에 드넓은 초원이 펼쳐졌다. 현경은 가쁘게 몰아쉬는 숨을 진정시키며 레나를 보았다. 레나 역시 창백해진 얼굴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휴... 큰일 날 뻔했네. 괜찮아, 오빠?"
"난 괜찮은데... 네 덕분에 살았다. 근데 아까 그 마물들, 엄청나던데."
"와이번호크야. 하늘의 늑대 같은 냉정한 사냥꾼들이지. 무리 지어 다니는 것도 성가신데, 저렇게 갑자기 튀어나오는 기습은 정말 소름 끼쳐."
레나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오빠야말로 대단했어! 그 육망성... 처음 쓴 거 아니야?"
"나도 모르게... 그냥 머릿속으로만 그려봤던 건데, 정신 차리고 보니 이미 써버렸더라고."
레나가 놀란 눈으로 현경을 바라보았다.
"정말? 머릿속으로만 생각했던 걸 저런 순간에 바로 쓰다니... 오빠, 진짜 대단해! 덕분에 살았어."
현경은 붐크레프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첫 실전에서 얼떨결에 성공하긴 했지만, 머릿속으로 그렸던 것만큼 완벽하게 구현되지는 않아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날 밤 숲에서 벗어난 초원의 야영지에서, 모닥불 앞에 앉아 현경은 낮의 일을 떠올리며 레나에게 다시 물었다.
"아까... 아카데미에서 살아남는다고 했지. 저런 녀석들이 흔한 거야, 거기선?"
레나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음... 저렇게 대놓고 습격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실전 훈련이나 과제 중에는 위험한 상황이 종종 있어. 경쟁도 치열하고... 다들 한가닥 하는 애들이 모이니까. 하지만 오빠라면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나도 도울 거고."
그녀는 애써 밝게 말했지만, 현경은 그 이면에 숨겨진 고충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미안하다, 레나. 내가 많이 늦어서... 너 혼자 고생하게 만들고."
"그런 말 하지 마, 오빠."
레나가 부드럽게 말했다.
"오빠가 와서 얼마나 기쁜데. 이제부턴 같이 있잖아. 그거면 됐어."
밤하늘에는 여전히 기묘한 별들과 두 개의 달이 떠 있었다. 현경은 불침번을 서며 루시퍼와 조용히 교감을 나누었다. 검은 엔젤 페가서스는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마침내 나흘째 되는 날 오후, 길었던 여정의 끝이 보였다. 멀리 지평선 너머로 거대한 도시, 아르카눔의 윤곽이 드러났다.
"오빠, 저기 보여? 드디어 아르카눔이야!"
레나가 한껏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현경은 숨을 삼켰다.
하늘 높이 솟은 성벽과 첨탑들, 도시 중앙에 우뚝 솟은 아카데미 본관. 성벽 너머로 느껴지는 활기찬 도시의 기운. 와이번호크와의 조우로 인한 긴장감은 어느새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진짜... 크네.... 저기가 그 곳인가."
남매는 도시 성벽이 잘 보이는 외곽의 한적한 공터에 내려섰다. 페가서스는 오브에 다시 수납하였다. 거대한 성문 앞에는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북적였다. 마차와 상인들, 기사와 마법사, 그리고 인간 외의 다양한 종족들. 마치 판타지 소설 속 삽화가 눈앞에 펼쳐진 듯한 광경이었다.
"음... 살짝... 긴장되는 걸..."
현경은 기대와 불안감이 교차하는 심정으로 중얼거리며, 레나와 함께 인파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르카눔의 거대한 성문이 그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새로운 세계에서의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될 무대.
현경은 아르카눔을 향해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