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아르카눔에서의 하루
다음 날 아침, 여관 창문으로 스며드는 아르카눔의 햇살은 낯설면서도 어딘가 희망적인 기운을 품고 있었다. 커튼 사이로 들어온 빛줄기가 방 안의 먼지를 선명하게 비췄다. 잠에서 깬 현경은 삐걱거리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래층 거리에서는 벌써부터 활기찬 소리가 들려왔고, 어제와는 또 다른 분주함이 느껴졌다. 레나는 이미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오빠, 잘 잤어?"
레나가 돌아보며 물었다. 그녀는 아카데미에 갈 준비를 마친 듯, 단정한 교복 차림이었다.
"응. 너도."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두 사람은 여관 1층의 식당으로 내려갔다. 식당은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여행객들과 현지인들로 북적였다. 뜨거운 수프와 갓 구운 빵 냄새가 식당 안을 가득 채웠다. 현경은 레나가 주문해 준, 처음 보는 향신료가 들어간 수프와 딱딱하지만 고소한 빵으로 아침 식사를 했다. 주변 사람들의 대화는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와 익숙한 제국어가 뒤섞여 웅성거렸다.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아카데미로 갈 준비를 하는 동안, 레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빠, 있잖아... 여기서 지내려면 가명을 쓰는 게 어떨까 싶어."
현경은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다듬다 말고 레나를 돌아보았다.
"가명?"
"응. 아무래도 오빠 본명이나 모습은 좀... 눈에 띌 수 있으니까.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고. 여기는 워낙 다양한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라."
레나의 말에 현경은 잠시 턱을 괴었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이곳 아르카눔에서는 확실히 눈에 띄는 외모였다. 레나의 제안은 타당했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이름이 좋을까?"
레나가 물었다.
"혹시 생각해 둔 이름 있어?"
현경은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복잡하게 얽힌 도시의 지붕들과 그 너머로 보이는 하늘. 그는 어떤 이름이 자신에게 어울릴지 잠시 고민했다. 미간을 좁힌 채 창밖을 응시하던 그의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키안."
"키안? 뜻이 있는 이름이야?"
레나가 의아한 듯 되물었다.
"아니. 그냥... 떠올랐어."
현경은 짧게 덧붙였다. '키안'이라는 이름에 얽힌 다른 이야기는 꺼내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 이 이름이 괜찮을 것 같다고만 말했다.
레나는 잠시 오빠, 아니 이제 '키안'이라고 불러야 할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무심했지만, 어딘가 전과는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키안 오빠... 알겠어. 그렇게 부를게!"
레나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오스포지 아카데미는 아르카눔에서도 가장 웅장한 건물 중 하나였다. 고풍스러운 본관 건물 앞 넓은 광장에는 이른 아침부터 학생들이 오가고 있었다. 방학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광장에는 개인 연구나 동아리 활동을 위해 남은 학생들이 눈에 띄었다. 거대한 석조 건물과 그곳을 오가는 학생들의 모습은 현경을 시선을 사로잡는 듯했다.
레나가 익숙하게 현경을 이끌어 행정처로 안내했다. 행정처 내부는 생각보다 더 넓고 분주했다. 여러 개의 창구에는 학생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서류를 나르는 작은 골렘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현경은 레나의 안내에 따라 빈 창구로 다가가 추천서를 내밀었다.
추천서를 받아든 중년의 행정관은 서류 더미에서 눈을 들지도 않은 채 건성으로 물었다.
"편입 신청인가요? 신원 보증 추천서는 두 부 이상 준비하셨겠죠?"
그는 현경의 차림새를 한번 훑어보고는 별 기대 없다는 듯, 마지못해 추천서 봉투를 받아 들었다. 안경 너머로 현경을 한번 훑어보더니, 무심하게 봉투를 열었다. 봉투 안의 내용을 확인한 그의 눈썹이 살짝 치켜올라갔다.
"이, 이건... 흑경 님의 추천서로군요!"
흑경? 현경은 처음 듣는 이름에 고개를 갸웃하며 옆에 선 레나를 쳐다보았다. 레나는 현경의 시선을 느끼고는, 맞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짧은 놀람도 잠시, 행정관은 헛기침을 하며 표정을 가다듬고 서류를 안쪽으로 넘겼다. 그의 태도가 처음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딱딱했던 표정이 누그러지고 눈빛에는 존중의 기색마저 서렸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 다른 서류 몇 장을 들고 나왔다.
"흠흠. 원래 저희 아카데미 편입은 절차가 상당히 복잡하고, 증빙해야 할 서류도 많습니다. 아시다시피 카오스포지는 제국 최고의 아카데미니까요. 신원 보증부터 시작해서..."
행정관은 잠시 말을 고르더니, 어조를 조금 더 부드럽게 바꾸었다.
"하지만 흑경 님의 추천이 있으니, 일단 편입 시험을 치를 자격은 충분히 주어집니다. 추천장이 없으셨다면 신원 증명 단계부터 난관에 부딪혀 시험 기회조차 얻기 어려웠을 겁니다. 정말 운이 좋으시군요."
행정관은 이전보다 조금 더 공손해진, 그러면서도 여전히 사무적인 어조로 설명을 이었다.
"서류는 내부 검토 후, 시험 일정과 장소를 확정하여 안내해 드릴 겁니다. 혹시 머무시는 곳 주소를 알려주시겠습니까? 시험 일정이 정해지면 저희 아카데미의 '전보 골렘'이 신속하게 소식을 전해줄 겁니다."
"시험 결과에 따라 최종 편입 여부와 배정 학년, 그리고 수강 가능 과목 등이 결정될 예정입니다."
"혹시 시험은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알 수 있을까요?"
현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음, 흑경 님 추천이라도 기본적인 자질 평가는 필요합니다. 필기시험과 실기 시험으로 나뉘는데, 필기는 기초 마법 이론과 제국 역사, 그리고 논리 사고력을 평가합니다. 실기는 지원자의 잠재력과 마력 적응력, 그리고 위기 대처 능력을 주로 평가합니다. 아마 흑경 님께서 어느 정도 언질을 주셨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자세한 내용은 추후 안내될 예정이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현경은 레나가 미리 일러준 대로 여관의 주소를 또렷하게 말해주었다. 행정관은 받아 적으며 몇 가지 추가 질문을 했다. 이름, 나이, 이전 거주지 등 기본적인 신상 정보였다. 현경은 레나가 미리 준비해준 대로 '키안'이라는 이름과 적당한 정보를 둘러댔다. 행정관의 설명에 현경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접수를 마치고 행정처를 나오자 레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현경의 팔을 가볍게 툭 쳤다.
"휴, 일단 접수는 잘 끝났네! 역시 케이 님 이름이 확실히 효과가 있나 봐."
"그런 것 같네."
현경은 탐탁치 않은듯 짧게 대답하며 아카데미 건물을 다시 한번 올려다보았다. 높은 첨탑과 화려한 장식이 그의 눈길을 사로잡는 듯했다.
"이제 연락 올 때까지 기다리면 돼. 시간이 좀 남는데, 우리 아르카눔 구경이나 할까? 오빠, 여기 시장 진짜 볼 거 많아! 아카데미 근처에도 재미있는 가게들 많고."
레나의 제안에 현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데미 주변을 둘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레나는 현경의 팔을 잡아끌며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아냐, 시장 먼저 가자! 아카데미는 나중에 내가 구석구석 구경시켜줄게. 시장이 훨씬 재밌을걸?"
두 사람은 아카데미를 나와 곧장 도시에서 가장 번화하다는 중앙 시장 거리로 향했다. 시장으로 향하는 길에도 현경의 눈길을 끄는 것들이 많았다. 스스로 굴러가는 마차,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
시장은 입구부터 인파로 북적였다. 그야말로 혼돈과 활기의 도가니였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온갖 소리와 냄새가 뒤섞여 현경은 저도 모르게 잠시 숨을 멈췄다. 톡 쏘는 이국적인 향신료 냄새, 달콤하게 코를 간지럽히는 과자 냄새, 쌉싸름하면서도 상쾌한 약초 냄새,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법 약품 냄새까지 공기 중에 부유했다. 사람들의 활기찬 외침과 흥정 소리, 마차 바퀴 구르는 소리, 마법 도구가 작동하는 기계음, 정체 모를 동물들의 울음소리가 끊임없이 귓전을 울렸다.
현경의 눈은 쉴 새 없이 좌우를 살폈다. 난생 처음 보는 형형색색의 과일들이 노점 가판대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어떤 것은 스스로 은은한 빛을 내뿜는 듯했고, 어떤 것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듯 보여 현경을 놀라게 했다. 레나는 옆에서 저건 '루미나 애플'이고 밤에도 빛나서 등불 대신 쓰기도 한다고, 저 꿈틀거리는 건 '젤리 푸딩 후르츠'인데 식감이 특이해서 인기가 많다고 설명해주었다.
번쩍이는 신기한 마법 도구를 파는 노점 앞에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의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 있었다. 공중에 작은 불꽃을 피우는 장갑, 멀리 있는 소리를 들려주는 귀걸이, 색깔이 계속 변하는 망토 등이 진열되어 있었다. 기묘한 문양이 새겨진 장신구를 온몸에 휘감은 행상인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노래하듯 외치며 손님을 끌었다.
"저 상인은 남쪽 사막 유목민 출신인데, 저 장신구에 행운을 부르는 힘이 깃들어 있대. 우리 아카데미 교수님 중 한 분이 진짜 효과가 있다고 논문까지 쓰셨다니까? 물론 믿거나 말거나지만."
레나가 옆에서 속삭이듯 설명해주었다.
거리에는 다양한 인종들이 자연스럽게 섞여 있었다. 뾰족한 귀를 가진 우아한 엘프가 가죽 갑옷을 입은 드워프와 흥정을 하고 있었고, 복슬복슬한 꼬리를 살랑이는 수인족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뛰어다니다가 현경의 다리에 부딪힐 뻔하기도 했다. 그들의 독특한 복장과 생김새, 그리고 자연스럽게 마법을 사용하는 모습은 현경에게 이곳이 자신이 알던 세계와는 다르다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한 상인은 손짓 한 번으로 화려한 불꽃을 피워 올려 꼬치를 굽고 있었다. 다른 노점에서는 주인이 주문을 외우자 진열된 물건들이 스스로 포장되어 손님에게 날아가는 모습도 보였다. 이런 비현실적인 광경들이 이곳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상인 듯했다. 현경은 이 모든 신기한 광경을 조용히 눈에 담으며, 낯선 세계의 흐름에 적응하려 애썼다.
레나는 그런 현경의 옆에서 조용히 미소 지으며, 그가 특정 장소에서 시선을 떼지 못할 때마다 다가가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저건 '라이트 스톤'이라는 건데, 밤에 불을 밝힐 때 쓰는 거야. 마력을 조금만 주입하면 오랫동안 빛나. 우리 여관 복도에 있는 것도 저거야."
"이쪽은 약초 거리인데, 희귀한 약초가 많아서 연금술사들이 자주 찾아와. 저기 봐, '만드라고라'도 있어! 뽑을 때 비명 지르는 거 들으면 안 좋다고 하던데."
레나의 설명을 들으며 시장 안쪽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자, 더욱 신기한 것들이 눈에 띄었다.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작은 나무 인형 '모크링'이 걸어 다니며 전단지를 나눠주거나,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내는 '싱잉 플라워'가 화분에 담겨 팔리고 있었다. 현경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노래하는 꽃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오빠, 저거 먹어볼래? 아르카눔 명물인데, 이름은 '크런치 웜'이야! 처음엔 좀 그래도 먹다 보면 완전 중독된다니까?"
레나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꼬치에 꿰어 기름에 바삭하게 튀긴, 통통하고 붉은빛을 띤 애벌레처럼 생긴 것이 먹음직스럽게 진열되어 있었다. 고소한 냄새가 풍겨왔지만, 현경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봐도 벌레였다.
"괜찮아?"
"에이, 뭘 그래! 보기보다 맛있다니까? 한번 먹어봐, 응?"
레나는 망설이는 현경의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이미 두 개를 사서 그의 손에 하나를 쥐여주었다. 꼬치를 받아든 현경은 잠시 망설였지만, 레나의 기대에 찬 눈빛과 주변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그것을 먹는 모습에 용기를 내기로 했다. 눈 딱 감고 한입 베어 물었다.
'윽!'
입안에서 톡 터지는 식감과 함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맛이 느껴졌다. 바삭한 껍질 안에는 부드러운 크림 같은 속살이 있었고, 고소하면서도 살짝 매콤한 양념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예상치 못한 새로운 맛에 현경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한 번 더 꼬치를 베어 물었다. 생각보다 훨씬 괜찮았다.
"거봐, 맛있지? 내가 뭐랬어!"
레나는 뿌듯한 얼굴로 활짝 웃었다.
"이거 말고도 맛있는 거 진짜 많아! 저쪽에는 '구름 솜사탕' 파는데, 구름처럼 엄청 부드러워서 입에 넣자마자 사르르 녹아! 맛도 은은하고. 그리고 저기 '톡톡이 주스'는 마시면 작은 베리 씨앗이 입안에서 톡톡 터지는 게 재밌어!"
레나는 신이 나서 다른 길거리 음식들도 연신 권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따끈한 빵이며, 혀를 톡 쏘는 신기한 사탕까지. 현경은 레나가 이끄는 대로 시장 곳곳을 누비며 처음 맛보는 음식들을 경험하고, 신기한 물건들을 구경했다. 레나가 들려주는 아르카눔의 이야기와 사람들의 모습, 도시의 활기찬 분위기는 현경에게 낯설지만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왔다.
어느새 그의 차가웠던 인상에도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