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폭풍의 눈
아카데미 외곽.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허름한 골목 끝에, 낡은 창고를 개조한 건물이 하나 있었다.
현경은 뒤를 돌아보았다. 도적 길드는 이미 한참 멀어졌다.
카이론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중에 다시 보자고.'
그 말투는 가벼웠지만, 눈빛은 달랐다. 특히 붐크래프트를 보던 그 시선.
"여기야."
에일린이 창고 문 앞에서 손짓했다. 그녀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문 옆의 낡은 철판을 들춰내고, 숨겨진 마력 장치에 손을 갖다 댔다. 푸르스름한 빛이 스며들더니, 잠겨 있던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들어와. 밖에서 보이면 곤란하니까."
세 사람은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에일린이 문을 닫자, 바깥의 소음이 완전히 차단되었다.
내부는 생각보다 평범했다.
먼지가 쌓인 작업대, 녹슨 연장들이 걸린 벽, 낡은 책들이 쌓인 선반이 보였다.
에일린은 중앙의 작업대에 걸터앉으며 한숨을 쉬었다.
"후... 일단 살았네."
"에일린, 고마워. 네가 아니었으면..."
레나가 안도의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아. 여긴 안전해. 이 공방 위치는 너 말고는 아무도 모르니까."
에일린이 말하며 현경을 힐끗 쳐다보았다. 레나가 그 시선을 따라 오빠를 보더니, 뒤늦게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아직 제대로 인사 안 했네. 오빠, 이 애가 에일린이야. 내가 아르카눔에서 처음 친구가 된 애. 에일린, 내 오빠 키안이야."
에일린은 현경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오... 그래서 네가 레나 입에서 맨날 나오던 그 키안 오빠구나?"
"에일린!"
레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하지만 에일린은 그런 레나를 보며 더욱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생각보다 평범한데? 레나 말로는 엄청 똑똑하고, 동생 잘 챙겨주고, 위기에서 항상 구해준다며?"
"그, 그런 말 안 했어!"
"했는데? '우리 오빠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거 몇 번째 들은지 아냐?"
"......"
레나는 더 이상 반박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에일린은 다시 현경을 보며 턱을 괴었다.
"근데 오늘 본 거로는... 위기를 만드는 쪽에 더 가까운 것 같은데?"
"......그건 변명의 여지가 없네요."
현경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일린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도적 길드에서 벌어진 난장판은 분명 자신이 원인이었으니까.
"그래도 처음 뵙습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현경이 뒤늦게 정식으로 인사했다. 에일린은 손을 흔들며 웃었다.
"뭐, 괜찮아. 레나 언니 덕분에 재밌는 구경했는걸. 그나저나 일단은 살아서 나온 게 중요하지."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나 잠깐 물 좀 떠올게. 너희 목도 마를 거 아냐."
"응, 고마워."
레나가 답하자, 에일린이 안쪽으로 사라졌다. 현경과 레나만 공방에 남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낡은 작업대 위에 쌓인 먼지가 어둑한 공방 안에서 희미하게 반짝였다. 현경은 허리춤의 붐크래프트를 내려다보았다. 검집에 난 흠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레나가 조심스럽게 오빠의 얼굴을 살폈다. 표정은 차분했지만, 눈빛은 여전히 불안해 보였다.
"오빠."
"응?"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카이론 그 사람이... 위험해 보였는데."
현경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태연한 척 웃었다.
"말했잖아. 그냥 호기심에 부른 거라고. 별일 없었어."
"하지만..."
레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오빠는 늘 이랬다. 위험한 순간에도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태연한 척했다. 6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다음부턴 절대 혼자 가지 마."
레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도 이제 도울 수 있다고. 오늘처럼. 나... 더 이상 오빠 혼자 위험한 일 떠맡게 하기 싫어."
현경은 잠시 동생을 바라보았다.
메탈 가고일을 타고 벽을 부수며 난입했던 레나. 자신을 구하기 위해 주저 없이 달려왔던 동생.
예전의 작고 연약했던 레나가 아니었다. 6년이라는 시간이 그녀를 성장시켰다.
현경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고마워. 덕분에 빨리 빠져나왔어."
"정말?"
"정말."
레나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걱정스러운 기색이 남아있었다.
현경은 동생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레나는 잠시 눈을 감고 오빠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현경의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불안이 남아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카이론이 자신의 검에 얼마나 큰 관심을 보였는지. 그가 단순히 호기심으로 넘어갈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잠시 후, 에일린이 낡은 물병 세 개를 들고 돌아왔다.
"자, 여기."
그녀가 물병을 건네자, 세 사람은 침묵 속에서 물을 마셨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차가운 물이 긴장을 조금씩 풀어주었다.
현경은 물병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레나도 마찬가지였다. 도적 길드에서의 소동이 아직도 생생했다.
에일린이 물병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현경의 허리춤을 가리켰다.
"근데 말이야."
거기엔 붐크래프트가 매달려 있었다.
"그 검이 뭐길래 카이론 그 사람이 그렇게 관심을 보였어? 나는 잘 모르겠는데... 그냥 검처럼 보이던데?"
현경은 잠시 망설였다.
검을 내려다보고, 다시 에일린을 보았다. 그녀는 순수한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레나도 옆에서 오빠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나가 신뢰하는 친구라면, 그리고 당분간 이곳에 신세를 질 거라면, 숨기는 것보다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현경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건... 테리우스 경의 검이야."
"테리우스 경?"
에일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름이 낯설지는 않았지만, 정확히 누구인지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수메르로의 수호 기사가 쓰던 아티팩트지."
"수메르로...?"
에일린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갑자기 입을 크게 벌렸다.
"잠깐, 설마...!"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수메르로 멸망 사건 때 그 테리우스 경?! 20만 명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그 사건?!"
"......아는구나."
현경이 조용히 답했다. 에일린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붐크래프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걸 어떻게... 아니, 왜 오빠가 그 사람 검을..."
에일린은 말을 잇지 못했다. 수메르로 멸망 사건은 최근 일어난 대참사였다. 20만 명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제국 전역을 충격에 빠뜨린 사건.
레나도 불안한 표정으로 오빠를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오빠가 그 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었다.
현경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문제야."
그는 검집을 가볍게 두드렸다.
"테리우스 경의 검이라는 건, 알만한 사람들에게는 유명해. 강자나 정보통, 아티팩트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이걸 알아볼 수 있어. 함부로 들고 다닐 수가 없어."
레나가 오빠의 표정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오빠, 아까 그 사람... 카이론이 오빠 검 보고 뭔가 눈빛이 달라졌던 것 같은데. 괜찮은 거 맞아?"
"...맞아."
현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론이 이걸 알아본 것 같아. 아니, 확실히 알아봤어."
그는 붐크래프트의 손잡이를 쓰다듬었다. 차갑고 묵직한 감촉이 손바닥에 전해졌다.
이 검은 자신의 유일한 무기였다. 테리우스의 힘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 이것 없이는 자신의 전력이 절반도 안 될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위험했다.
"이 검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현경은 미간을 찌푸렸다.
"숙소는 위치가 노출되어 위험하고, 몸에 지니고 다니자니 눈에 띄고..."
레나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검을 그냥 드러내고 다니면 위험하잖아. 가려야 하는 거 아니야?"
현경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평소에 너무 부주의했다. 검을 아무렇게나 차고 다니다가 카이론에게 들킨 것이다.
"아까도 그래서 들킨 거야. 길을 걷다가 검을 본 카이론의 눈빛이 달라졌어. 순간적으로 느꼈지. 저 사람이 이 검을 알아본다는 걸."
에일린이 턱을 괴며 생각하더니, 제안했다.
"천으로 감싸면 어때? 아니면 검집에 넣고 천으로 한 번 더 감싼다든지. 완전히 숨길 순 없어도, 최소한 한눈에 알아볼 수 없게는 만들 수 있잖아."
"...그래야겠네."
현경은 검집을 내려다보았다. 에일린의 말이 맞았다. 완전히 숨길 수는 없어도, 최소한 눈에 띄지 않게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앞으론 조심해야지. 천으로 감싸고 다니면, 적어도 지나가다 우연히 알아보는 일은 없을 거야."
레나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곧 다시 걱정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카이론은 이미 봤잖아..."
"...그래."
현경은 무겁게 답했다. 이미 늦었다. 카이론은 검을 봤고, 분명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에일린이 팔짱을 끼고 물었다.
"근데 숙소 문제는 어떻게 할 거야? 도적 길드한테 위치 들켰다며? 거기로 돌아가면 위험하잖아."
현경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문제네."
기존 숙소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했다. 카이론이 찾아올 가능성이 있었고, 그렇게 되면 레나까지 위험에 빠질 수 있었다.
"다른 곳을 알아봐야 할 것 같은데, 당장은..."
"여기 있다 가."
에일린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방 많으니까. 레나 언니 오빠면 뭐 괜찮지."
"...정말 괜찮아?"
현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에일린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레나가 예전에 날 구해준 적도 있는데, 이 정도는 해줘야지."
"에일린..."
레나가 에일린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현경도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신세를 많이 지게 됐네요."
"뭐, 괜찮아."
에일린이 손을 흔들었다. 그러고는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대신 심심하면 재밌는 얘기 좀 해줘. 키안 오빠가 어떻게 그 유명한 테리우스 경의 검을 가지게 됐는지 엄청 궁금하거든."
"...기회가 되면."
현경은 애매하게 웃으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지옥로에서의 일. 테리우스를 만났던 일. 그의 힘과 기억을 이어받았던 일.
그 모든 것은 아직 말할 수 없었다.
세 사람은 겨우 숨을 돌렸다.
에일린이 하품을 하며 일어섰다.
"그럼 방 안내할게. 오빠는 2층 끝방 쓰면 돼. 레나는 예전처럼 옆방 쓰고."
"응, 고마워."
레나가 답했다. 에일린이 계단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침구는 오래됐지만 깨끗해. 내가 가끔 빨아놨거든. 아, 그리고 밤에 이상한 소리 들려도 놀라지 마. 지하에서 나는 소리니까."
"지하?"
현경이 되물었다. 에일린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댔다.
"비밀. 나중에 보여줄게."
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계단을 올라갔다. 레나가 현경의 손을 잡아끌었다.
"오빠, 가자. 피곤하잖아."
"...그래."
현경은 레나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낡은 계단이 삐걱거렸다.
2층은 좁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방 세 개가 나란히 있었다. 에일린이 끝방의 문을 열었다.
"여기. 좁긴 한데 참아줘."
"아니, 충분해요. 고마워요."
현경이 방 안을 둘러보았다. 작은 침대와 낡은 책장, 먼지 쌓인 창문. 간소했지만 쉴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에일린과 레나가 옆방으로 들어가고, 현경은 혼자 남았다.
그는 문을 닫고, 허리춤의 붐크래프트를 풀어 침대 옆에 세워두었다.
창문 너머로 아르카눔의 밤 풍경이 보였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가로등들. 저 멀리 아카데미의 첨탑이 희미하게 보였다.
현경은 침대에 앉아 붐크래프트를 내려다보았다.
'아카데미 편입 시험을 기다리며 조용히 지낼 생각이었는데...'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일들이 계속 일어났다. 카이론과의 조우. 그리고 그가 보인 관심.
현경은 한숨을 쉬었다.
당분간은 조용히 지내야 했다. 천으로 검을 가리고, 눈에 띄지 않게 움직여야 했다.
그는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올려놓고, 침대에 누웠다.
피로가 밀려왔다.
현경은 눈을 감았다. 내일은 내일 걱정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