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오클러 학과 입성과 숨겨둔 기물
붉은 합격 인장이 찍힌 편입 서류.
그것을 아카데미 본관 행정 접수대에 제출했다.
정식 입학 수속을 마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법과 초고대 유물 오파츠가 공존하는 대륙의 중심.
신트락스 제국 최고의 엘리트 교육기관, 카오스포지 아카데미.
아카데미 내부 규정상 모든 지원자와 학생은 학기 중 지정된 학과 기숙사 구역에 거주해야 했다.
그것은 예외 없는 철저한 의무였다.
아카데미 본관 1층 기숙사 수속 창구.
묵직한 제복을 입은 기숙사 관리인이 서류를 확인하고 황동 열쇠를 내밀었다.
관리인은 백발이 성성한 노파로, 돋보기를 건너다보며 무심하게 말을 덧붙였다.
"오클러 학과 동관 304호다. 기숙사 규칙을 준수하도록."
관리인이 기숙사 수칙이 적힌 양장지를 건넸다.
"식사 시간은 아침 7시부터 9시, 저녁은 6시부터 8시까지다. 기숙사 내 마법 실험이나 무단 마력 배출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위반 시 벌점이 부여된다."
"알겠습니다."
현경은 서류와 황동 열쇠를 챙겨 들었다.
열쇠 표면에는 '오클러 학과 동관 304호'라는 룬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현경은 안내 표식판을 따라 오클러 학과 기숙사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기숙사 입구부터 고풍스러운 석조 향기와 말린 허브 향이 짙게 뿜어져 나왔다.
높은 나선형 석조 계단.
현경은 계단을 따라 차분하게 걸어 올라갔다.
계단 모퉁이마다 고대 마도 불빛이 은은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계단 벽면에는 과거 아카데미를 빛낸 뛰어난 오클러들의 초상화와 아티팩트 도면들이 걸려 있었다.
계단 창밖으로는 카오스포지 아카데미의 수많은 학과 건물들과 넓은 중앙 교정이 한눈에 들어왔다.
마법사 학과의 뾰족한 은빛 첨탑들.
기사 학과의 웅장한 연무장 대련장.
키메라 술사 학과의 둔탁한 마도 연구동들.
그리고 현경이 속하게 된 오클러 학과의 검은 석조 기숙사 건물.
아카데미 경내를 가로지르는 학생들의 모습이 아득하게 보였다.
현경은 나선형 계단을 올라 3층 복도 끝에 다다랐다.
복도 좌우로 매끄러운 놋쇠 문고리가 달린 방문들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놋쇠로 장식된 방문 앞에 서서 열쇠를 구멍에 꽂고 돌렸다.
달칵.
소리 없이 문이 열렸다.
상급 기숙사 독방.
고풍스러운 검은 슬레이트 석조 벽.
아득히 솟아오른 아치형 유리 창문.
묵직한 오크나무 가구들이 정갈하게 배치된 방이었다.
침대와 책상, 옷장이 정갈하게 들어서 있었다.
창밖으로는 아카데미 중앙 광장의 거대한 첨탑들이 내려다보였다.
하늘을 이스듬히 가르는 푸른 마도 결계 장막이 한눈에 들어왔다.
현경은 방안을 한 바퀴 천천히 둘러보았다.
석조 벽면에는 기본적인 마도 온도 조절 아티팩트가 박혀 있어 방 안의 공기를 항상 서늘하고 쾌적하게 유지해주고 있었다.
오크나무 책상 위에는 정갈하게 가공된 양장지와 깃펜, 그리고 아카데미 기본 서식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현경은 창문 옆에 위치한 고풍스러운 슬레이트 벽난로에 손을 대보았다.
벽난로 내부에는 온열 마도석이 조용히 박혀 있어 불꽃을 피우지 않고도 서늘한 밤공기를 기분 좋게 덥혀주고 있었다.
현경은 창문의 두꺼운 철제 빗장을 창틀에 맞추어 내려보았다.
창문 틈새로 들어오는 바람 소리가 뚝 꺼지며 완벽한 기척 차단 상태가 만들어졌다.
현경은 의자에 조용히 앉아 단정하게 마감된 나무 감촉을 느꼈다.
지옥로의 기운을 몸 깊숙한 곳에 감춘 채 가슴에 손을 올려보았다.
아무런 반응도 나지 않았다.
케이의 붉은 영식 인장이 행정 수속과 정밀 마도 검사를 완벽하게 보호해준 덕분이었다.
벽면에 걸린 마도 램프가 조용히 은은한 푸른빛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방 한쪽의 오크나무 옷장은 고풍스럽고 두꺼운 재질로 만들어져 있어 묵직한 무게감을 자아냈다.
현경은 방문 빗장을 한번 지그시 걸어보았다.
두꺼운 철제 빗장이 장그랑 소리를 내며 완벽하게 물렸다.
완벽한 사생활이 보장되는 공간이었다.
탁-!
현경은 묵직한 오크나무 방문을 뒤로 걸어 잠갔다.
그리고 묵직한 숨을 길게 내쉬었다.
후우...
어깨에서 내려놓은 두꺼운 천 뭉치.
수메르로의 수호 기사 테리우스의 검, 붐크레프트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놓였다.
쿵.
현경은 천으로 둔탁하고 꽁꽁 감싼 붐크레프트를 집어 들었다.
천의 틈새를 아주 살짝 열어 붐크레프트의 붉은 룬 문양을 확인했다.
여전히 붉은 빛이 검신을 따라 아른거리고 있었다.
현경은 천을 다시 한번 꽁꽁 감싸쥐었다.
방 한구석.
장롱과 벽 사이의 어두운 깊숙한 그림자 공간.
그곳에 검을 모셔두고 단단히 고정했다.
외부에서 건너다보아도 전혀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였다.
'일단 첫 번째 큰 고비는 넘어섰다.'
현경은 가슴에 조용히 손을 얹었다.
케이의 추천서가 없었다면 편입 시험장 측정관의 정밀 마도구 앞에서 지옥로의 정체가 노출될 뻔했다.
치명적인 위기를 맞이했을 터였다.
케이의 붉은 영식 인장 하나가 행정적 보호막이 되어준 셈이었다.
지옥로와 붐크레프트의 정체를 안전하게 가려주었다.
이 낯선 아카데미에서 살아남고 동생을 지키려면...
지옥로의 힘과 붐크레프트를 철저히 가린 채 신중하고 묵직하게 움직여야 했다.
똑- 똑-
그때 기숙사 문을 정겹게 두드리는 경쾌한 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깨뜨렸다.
"오빠! 나야, 레나!"
현경은 장롱 옆 붐크레프트의 위치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완벽히 가려진 것을 본 뒤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카오스포지 아카데미 마법사 학과 정식 제복을 단정하게 입은 레나가 서 있었다.
활짝 웃는 얼굴이었다.
"합격 축하해, 오빠! 역시 무사히 통과할 줄 알았어!"
레나는 기숙사 안으로 쏙 들어왔다.
오빠의 방을 요리조리 둘러보며 감탄했다.
"우와, 오클러 학과 상급 기숙사라 그런지 방이 진짜 넓고 깨끗하다. 창밖 풍경도 엄청 좋다!"
"우리 레나가 2년 먼저 다닌 덕분이지."
현경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미안함과 고마움이 담긴 어조로 한마디 던졌다.
레나가 코웃음을 치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흥, 선배 대접은 제대로 해줘야 해. 내가 오늘 오빠를 위해서 아카데미 가이드 지도를 직접 그려왔거든!"
레나가 주머니에서 돌돌 말린 양장지 종이 한 장을 짠 하고 펼쳐 보였다.
종이 위에는 알록달록한 마도 잉크가 칠해져 있었다.
엉성하지만 정성껏 그려진 아카데미 전체 약도였다.
"여기 빨간색 표시가 마법사 학과 내 기숙사 위치고, 파란색 표시가 오클러 학과 메인 식당이야."
레나가 손가락으로 지도를 짚었다.
"메인 식당은 고기 요리랑 버섯 스튜가 진짜 잘 나와! 아침에는 따끈한 차랑 구운 빵도 나오거든."
레나가 재잘거렸다.
"그리고 오클러 학과는 응결 자체를 학과에서 따로 가르치거나 실기 평가를 대대적으로 하진 않아. 응결은 온전히 개인 역량이라 각자 알아서 다듬는 영역이거든. 대신 마도 아티팩트 제어 이론이나 구조학 위주로 수업이 진행될 거야."
레나가 설명을 덧붙였다.
"그리고 이 노란색 건물은 대도서관인데, 여기 지하 1층 빵집이 진짜 맛있어. 매일 아침 따끈따끈한 마도 오븐 파이가 나오거든."
레나는 손가락으로 약도를 짚어가며 재잘거렸다.
학원 동선과 주의해야 할 아카데미 규정들을 설명해주었다.
"아카데미에는 제국 귀족 파벌 학생들이랑 일반 편입생들 간의 구분이 좀 뚜렷한 편이야."
레나가 목소리를 낮추며 덧붙였다.
"하지만 케이 님이나 카이론 님의 영향력이 있어서 편입생이라고 함부로 시비를 걸거나 하지는 못할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현경은 조용히 들으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마법사 학과 동관이랑 오클러 학과 동관 사이에는 아카데미 중앙 정원이 있어."
레나가 손가락을 조금 옆으로 옮겨 짚었다.
"거기는 학생들이 수업 마치고 산책하러 많이 가는 곳이야. 마도 벤치도 있고 꽃밭도 예쁘게 가꿔져 있거든."
"수업 전공 서적은 대도서관에서 대여할 수 있는 건가?"
현경이 부드럽게 물었다.
"응! 도서관 2층에 오클러 학과 전용 서가 구역이 따로 있어. 거기서 아티팩트 기초 이론서랑 오클 응결 관련 도서들을 빌릴 수 있어."
레나가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마법사 학과 내 친구 에일린 알지? 그 애 공방도 대도서관 건너편 마도 연구동 지하에 있어. 그 애는 맨날 마도 아티팩트를 분해하고 개조하느라 방안이 아수라장이지만, 나중에 시간 되면 같이 놀러 가자!"
현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통금 시간은 밤 10시야."
레나가 진지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10시 넘어서 교정을 돌아다니다간 아카데미 결계 경비 골렘한테 잡혀서 일주일 동안 반성문 써야 하니까 조심하고!"
"알았어, 레나야. 조심할게."
현경은 레나가 그려온 약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피식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6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훌쩍 자란 여동생이었다.
하지만 오빠 앞에서 재잘거리는 모습만큼은 어릴 적 모습 그대로였다.
"고마워, 레나야."
"히히, 별말씀을! 오빠가 적응할 때까지 내가 자주 놀러 올 거니까 심심할 틈 없을 거야."
레나는 오빠의 방안을 흐뭇하게 둘러보았다.
그러다 구석 장롱 옆에 놓인 붐크레프트를 살짝 쳐다보았다.
"검은... 안전하게 잘 가려둔 거지?"
"응, 잘 가려뒀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응. 케이 님도 말씀하셨지만, 아르카눔 안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 게 제일 좋으니까."
레나는 안도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난 마법사 학과 저녁 전공 수업 준비하러 가볼게! 저녁은 식당에서 같이 먹자!"
"응, 조심히 들어가. 저녁에 보자, 레나야."
레나가 손을 흔들며 기숙사 방을 나섰다.
해 질 녘.
현경은 기숙사를 나와 오클러 학과 동관 교정으로 첫발을 내디렏다.
붉은 노을이 사그라드는 아카데미 하늘.
길가에 세워진 고대 아티팩트 마력등이 하나둘 푸른 빛을 피워 올렸다.
교정 통로를 지나가는 다른 오클러 학과 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저마다 가슴 부근의 응집기관을 조정하거나 마도구를 만지작거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통로 한쪽을 지나가는 현경을 향해 몇몇 지원자와 학생들이 눈길을 보냈다.
'저자가 흑경 님의 추천으로 편입한 신입생 키안인가.'
억지 도발이나 삼류 시비는 없었다.
그저 묵직하고 차분한 인상을 풍기는 낯선 편입생을 향한 조용한 호기심과 서늘한 경계심뿐이었다.
현경은 교정을 지나 중앙 정원 산책로를 걸었다.
푸른 마력등 불빛이 석조 길 위로 길게 늘어졌다.
밤하늘 아래 솟아오른 아카데미 첨탑들이 은은한 아티팩트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머리 위로 시원하게 불어오는 저녁 바람.
푸른 결계 장막 너머로 아득한 별빛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현경은 차분하게 숨을 내쉬었다.
오클러 학과의 높은 석조 아치 기둥들을 바라보며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이 앞으로 자신이 머물 무대였다.
동생 레나를 지키고, 테리우스의 유의를 잇기 위한 새로운 기착지였다.
중앙 정원의 조용한 석조 벤치에 앉은 몇몇 마법사 학과 학생들이 작은 마도 결정체를 띄워놓고 주문 연습을 하고 있었다.
현경은 그네들의 모습을 눈담아보며 천천히 지나쳤다.
아르카눔 전체를 감싸 안고 있는 제국의 마도 시스템.
그리고 이 거대한 아카데미 안에서 마력을 응결해내는 수많은 오클러 학생들.
하지만 자신에게 가슴속 깊이 새겨진 힘은 그런 인공적인 마력 응결 따위와는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지옥로의 압도적인 권능과 붐크레프트의 선연한 붉은 룬.
그것들을 완전히 감추고 다스릴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주도권을 잡게 될 터였다.
현경은 산책을 마치고 기숙사 동관 304호로 걸음을 돌렸다.
방문 빗장을 단단히 잠그고 의자에 앉았다.
책상 위 마도 램프의 푸른 빛이 은은하게 감돌았다.
창밖 아카데미 교정 위로 밤하늘의 짙은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현경은 창가에 서서 아카데미 중앙 광장의 첨탑들을 건너다보았다.
어깨에 둘렀던 붐크레프트의 감각, 그리고 가슴 깊은 곳 지옥로의 침묵.
이제 시작이었다.
현경은 천으로 싸인 붐크레프트의 감각을 떠올렸다.
푸른 마력등 빛이 내리쬐는 아카데미 교정을 차분히 걸었던 감각.
드러내어 설치지 않고...
묵직하고 깊은 무게감으로 이 세계에 자리 잡기 위한 신중한 발걸음이었다.
현경의 눈빛이 밤하늘의 별빛처럼 서늘하고 정교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