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그, 소년 현경은 완전히 벙진 상태였다.
분명 '동생을 살려달라'는 소원을 빌었지만, 그 직후의 기억은 소멸된 듯 끊겨 있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눈앞에 펼쳐진 것은 맥락 없는 지옥의 풍경이었으니, 온전한 사고가 가능할 리 없었다.
사방에서 영혼들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과 살점이 타들어 가는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용광로처럼 뜨거운 열기가 온몸을 감쌌다.
현경은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팔다리가 무거운 쇠사슬에 단단히 묶여 있음을 깨달았다.
금속성 마찰음과 함께, 불타는 듯 뜨겁게 달궈진 쇠사슬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살갗을 파고들며 지독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마치 영혼까지 지져지는 듯한 격통이었다.
"크윽...!"
고통스러운 신음을 삼키며 현경은 간신히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대한 가마솥, 혹은 용광로의 밑바닥처럼 보이는 공간에 그는 속박되어 있었다.
주변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영혼들이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 타며 영원히 반복될 듯한 고통 속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아직 희미하게 인간의 형상을 유지한 영혼들은 끊임없는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존재의 에너지를 조금씩 빼앗기고 있었다.
어떤 영혼은 이미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들게 타들어가 재처럼 흩날리고 있었고, 어떤 영혼은 희미한 윤곽만 남아 검붉은 불길 속에서 의미 없이 꿈틀거렸다.
영혼들의 절규는 마치 하나의 끔찍한 교향곡처럼 이곳 내부를 가득 메웠다.
공포와 극심한 혼란 속에서 현경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여기가 어디인지, 왜 자신이 이런 끔찍한 곳에 있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이 지옥 같은 광경이 자신이 빌었던 소원의 대가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만이 차갑게 온몸을 휘감았다.
'설마... 갑자기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그때, 바로 옆에서 나지막하지만 힘이 담겨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이 드는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다른 흐릿한 영혼들과 달리 뚜렷한 형체와 강렬한 눈빛을 유지하고 있는 한 영혼이 보였다.
그는 은빛 풀 플레이트 갑옷을 입고 있었다. 갑옷은 곳곳이 어둡게 그을려 있었고, 흉갑과 장갑에는 빛나는 붉은 잔불이 박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각진 얼굴에는 주름진 이마와 강인한 의지가 담긴 표정이 새겨져 있었고, 그의 눈은 동공 없는 빛나는 흰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의 머리카락이었다. 머리카락은 완전히 불꽃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뿌리 부분은 밝은 주황과 노란색이었다가 끝으로 갈수록 차가운 파란색으로 변해가며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주변의 영혼들은 형체가 흐릿하게 번져가며 재처럼 흩어지고 있었지만, 그 영혼만은 선명한 윤곽을 유지하고 있었다. 온몸이 지옥불에 휩싸여 고통스럽게 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빛에는 꺾이지 않은 기백과 고결함이 서려 있었다. 불꽃이 그의 몸을 감싸고 있었지만, 그 불꽃은 그를 소멸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강인한 의지를 더욱 드러내는 것처럼 보였다. 어두운 붉은 연기와 불꽃이 그의 갑옷 사이사이로 흘러나와 몸 주변을 감싸고 있었고, 주먹을 쥔 손가락 관절 주변에는 희미한 푸른 빛이 맴돌고 있었다.
그의 고결한 영혼과 강인한 정신력이 이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자아를 잃지 않고 버티게 해주는 듯했다. 다른 영혼들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형체를 잃어가는 것과는 달리, 그는 여전히 자신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당신은...?"
현경이 고통 속에서 힘겹게 묻자, 불타는 영혼은 희미하게, 그러나 어딘가 슬픔이 배어 있는 미소를 지었다.
"나는 테리우스. 한때 찬란했던 도시, 수메르로를 지키던 수호 기사였지... 이제는 그저 이곳에서 꺼져가는 불꽃, 한낱 불타는 영혼일 뿐이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과거의 영광과 현재의 처참한 현실에 대한 깊은 회한이 묻어났다.
테리우스는 잠시 말을 멈추고 현경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의 눈에는 의아함이 가득했다.
"이상하군. 이곳의 불길은 영혼마저 태워버리는 고통을 주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살아있는 육신 그대로, 불길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멀쩡한 것이지? 심지어 영혼의 기운마저 온전해 보여. 어찌 된 일인가?"
현경은 테리우스의 질문에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신도 왜 불에 타지 않는지, 왜 자신만 육신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모르겠습니다... 저는... 분명 제 동생과 함께... 누군가에게, 끔찍한 것들에게 쫓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곳에..."
기억을 더듬으려 했지만, 머릿속은 뿌연 안개처럼 흐릿할 뿐이었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은 동생의 겁에 질린 얼굴과, 자신을 삼키려 달려들던 끔찍한 괴물의 아가리였다.
'동생...! 그래, 동생은 어떻게 됐지? 내가 빌었던 소원... 그 소원은 정말 이루어진 건가? 동생은 무사한 건가?'
소원이 제대로 이루어졌는지, 하나뿐인 혈육인 동생이 무사한 것인지 확인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현경의 온몸에 힘을 다시 불어넣었다. 그는 자신을 묶고 있는, 살갗을 태우는 뜨거운 쇠사슬을 증오스럽게 노려보았다.
"으아아아!"
현경은 이를 악물고 온 힘을 다해 쇠사슬을 잡아당겼다.
뼈마디가 으스러지는 듯한 격통과 함께 살이 타는 역겨운 냄새가 다시 한번 코를 찔렀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필사적인 몸부림에도, 쇠사슬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움직임에 맞춰 더욱 강하게 살갗을 파고들며 고통을 가중시킬 뿐이었다.
"젠장...! 젠장! 안 돼...!"
몇 번의 격렬한 시도 끝에 현경은 완전히 탈진하여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에 그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이대로 영원히 이곳 밑바닥에서 고통받으며 스러져가야 하는 것인가.
그때, 현경의 처절한 몸부림과 깊은 절망을 지켜보던 테리우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소용없다. 그만두게, 소년. 그 쇠사슬은 단순한 금속이 아니야. 그것은 이 공간의 원념이 벼려낸 저주의 속박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끊어낼 수 없어."
테리우스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점점 더 희미해져 가는 자신의 영혼을 내려다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의 불타는 형체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하지만... 이 끔찍한 지옥불을 견뎌내는 자네라면... 그래, 자네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 내 영혼은 이미 한계야. 곧 자아를 잃고 저들과 같은 존재로 전락하겠지... 그 전에, 자네에게 내 모든 것을 걸어보고 싶네."
"모든 것...이라뇨?"
현경은 의심과 희망이 뒤섞인 눈으로 테리우스를 바라보았다. 낯선 존재의 제안을 섣불리 믿을 수는 없었지만, 그의 목소리에 담긴 무게감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자네는 이 지옥불 속에서도 타지 않는 육신과 영혼을 지녔어. 마치 기적처럼... 그러니 내 마지막 힘과, 수메르로의 수호 기사로서 쌓아온 모든 기억을 자네에게 넘겨주겠네. 그 힘이라면... 이 끔찍한 속박을 끊을 수 있을 거야."
테리우스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더욱 간절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그 대신... 부탁이 하나 있다. 부디 살아남아서... 가능하다면, 이 고통받는 영혼들에게 안식을 주게. 그것이 내가 하지 못한... 마지막 의무네."
테리우스의 제안은 칠흑 같은 절망 속에서 발견한 한 줄기 동아줄이었다. 하지만 그 줄은 피와 후회로 얼룩져 있는 듯했다. 그의 힘과 기억, 그리고 못다 한 의무까지 짊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현경의 어깨를 짓눌렀다.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현경은 깊은 회의감에 휩싸였다. 이토록 강인해 보이는 기사조차 결국 실패하고 스러져가는데, 고작 평범한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실패한다면, 그의 숭고한 희생마저 개죽음으로 만드는 꼴이 될 터였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자신을 옥죄는 뜨거운 쇠사슬, 귓가를 찢는 비명, 그리고 무엇보다... 동생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선택의 여지는 없어. 살아야 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현경은 폐부 깊숙이 뜨거운 공기를 들이쉬었다 내쉬며 마음을 다잡았다.
흔들리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으며 단호한 결의가 들어찼다.
그는 불타는 영혼, 수메르로의 마지막 수호 기사를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제가 당신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무거운 짐을 감당할 수 있을지도요."
현경은 자신의 한계를 솔직하게 인정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당신의 의지는 헛되지 않게 하겠습니다. 거래를 받아들이죠."
현경의 결연한 대답에, 테리우스는 마침내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오랜 짐을 내려놓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의 불타는 몸이 마지막 생명을 태우듯, 눈부시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고맙네... 낯선 소년이여. 부디, 내 마지막 불꽃이 그대에게 구원의 희망이 되기를...!"
테리우스의 외침과 함께, 그의 불타는 영혼에서 응축된 순수한 에너지와 기억의 결정체인 눈부신 빛줄기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와 현경의 몸 안으로 세차게 흘러 들어왔다.
현경은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뒤틀리고 재구성되는 듯한, 영혼까지 뒤흔드는 격렬한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 극한의 고통 속에서, 테리우스의 일생과 지식, 경험이 담긴 엄청난 정보와 강력한 힘이 그의 영혼 속으로 폭풍처럼 밀려 들어왔다.
테리우스의 어린 시절, 기사 서임식의 벅찬 순간, 수메르로를 지키며 겪었던 수많은 전투의 기억들, 피와 땀으로 연마한 검술과 기사로서의 긍지, 그리고 케이라는 인물로부터 하사받았다는 아티팩트 '붐크래프트'에 대한 상세한 지식 - 심폭(心爆)의 생성 원리, 오클을 이용한 조작법, 연쇄 폭발의 메커니즘까지.
방대한 정보가 해일처럼 현경의 머릿속을 헤집고 지나갔다.
동시에, 테리우스의 강력하면서도 고결한 영혼의 힘이 현경의 몸과 영혼 깊숙이 스며들며 그를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인하게 만들었다.
그의 영혼은 테리우스의 영혼과 뒤섞이며 불안정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고통과 함께,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강력한 힘이 온몸에 차오르는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반면, 테리우스의 영혼은 빛을 급격히 잃어가며 점차 투명하게 희미해졌다.
마침내 모든 힘과 기억을 남김없이 넘겨준 그의 영혼은, 마지막으로 현경을 향해 희미한 미소를 남긴 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재가 되어 불길 속으로 흩어졌다.
그의 마지막 모습은 마치 오랜 임무를 마치고 안식에 드는 기사와 같았다.
"하아... 하아... 하아..."
힘과 기억의 폭풍이 잦아들자 현경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정신은 여전히 혼란스러웠지만, 몸 안에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하고 새로운 힘이 넘실거렸다.
테리우스에게서 흘러 들어온 기억의 파편들이 그의 의식 속에서 점차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자신이 처한 상황, 이 지옥 같은 공간의 정체가 떠올랐다.
이곳은 헬켈베로스라는 거대한 마수의 내부였고, '지옥로(Hell Road)'라 불리는, 삼켜진 영혼들을 끝없이 고문하며 에너지를 짜내는 끔찍한 기관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삼켜지기 직전, 밖의 세계, 수메르로에서 벌어진 끔찍한 참극의 기억이 너무나 생생하게 밀려왔다.
'이럴 수가... 도시 전체가... 수많은 사람들이...!'
분노와 슬픔, 그리고 테리우스의 마지막 부탁에서 비롯된 알 수 없는 책임감이 현경의 마음속에서 격렬하게 뒤섞였다.
그는 자신을 묶고 있던 쇠사슬을 다시 노려보았다.
이전이라면 감히 저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마력의 속박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테리우스에게 받은 기사의 힘과 영혼의 에너지가 온몸에 용솟음치고 있었다.
현경은 굳은 표정으로 팔에 힘을 집중했다.
혈관이 팔뚝 위로 선명하게 도드라지며 단단하게 근육이 부풀어 올랐고, 그의 의지에 저항하는 쇠사슬이 불길한 마찰음을 내며 삐걱거렸다.
지옥불의 열기만큼이나 뜨거운 마찰열이 쇠사슬과 피부 사이에서 피어올랐지만, 그는 더 이상 이전처럼 고통에 움츠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 열기가 자신의 의지를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연료처럼 느껴졌다.
콰드드득...! 콰드득!
그는 포기하지 않고 더욱 강하게 힘을 주었다.
마침내, 쇠사슬에 가해진 물리적인 힘과 현경 안에 깃든 새로운 에너지가 마력으로 벼려진 속박의 임계점을 넘어서자, 쇠사슬의 한 부분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휘어지고 끊어지기 시작했다.
현경은 입술을 깨물며 마지막 남은 힘까지 짜내었고, 마침내 '쨍그랑!' 하는 파열음과 함께 쇠사슬 한쪽이 완전히 끊어져 나갔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끊어진 쇠사슬 조각을 바닥에 던져버리고, 잠시 숨을 고른 뒤 곧바로 다른 쪽 쇠사슬도 같은 방식으로 힘겹게 끊어냈다.
마침내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 현경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빛은 이전의 혼란스러움과 공포 대신, 강철 같은 결의와 함께 테리우스의 기억이 남긴 알 수 없는 깊은 무게감이 담겨 있었다.
주변에서 여전히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수많은 영혼들의 고통스러운 절규 속에서, 그는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테리우스... 당신의 마지막 힘과 의지, 결코 헛되이 하지 않겠습니다.'
'우선... 여기서 나가야 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동생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 ...그리고 이 영혼들. 약속을 한 이상... 외면할 수는 없겠지.'
동시에 그는 자신이 운이 좋았음을, 아니, 기묘한 상황에 놓였음을 깨달았다.
테리우스는 정말 소멸 직전의 절박한 상태였고, 그 덕분에 자신은 예상치 못한 강력한 힘과 온전하진 못하지만 자신에겐 귀중한 그의 기억들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현실이라고 온전히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기괴하고 참혹했다.
방금 전까지 자신과 대화하던 고결한 기사의 영혼이 눈앞에서 재가 되어 사라지고, 그의 기억과 힘이 자신의 안에 공존한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 어려웠다.
'이건... 정말 현실인가? 아니면 아직도 악몽 속을 헤매고 있는 건가...'
현경은 마치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길을 잃은 듯한 몽롱한 심경으로 이 비현실적인 상황을 받아들이려 애썼다.
테리우스의 기억을 통해 어렴풋이나마 자신이 처한 상황 - 헬켈베로스 내부라는 것과 수메르로의 멸망 - 을 짐작했지만, 그는 자기 안에서 꿈틀거리는 테리우스의 힘과 기억이 아직 완전히 자신의 것이 되지 못했음을 느꼈다.
바로 그때, 다른 기억들보다 유독 강렬했던 테리우스의 마지막 기억, 즉 수메르로 멸망의 순간이 다시 한번 그의 의식을 강타했다.
화염과 비명으로 가득 찬 도시의 광경. 하늘을 뒤덮은 거대한 헬켈베로스의 끔찍한 모습. 속수무책으로 스러져가는 동료 기사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검(붐크래프트)을 놓지 않으려 했던 테리우스 자신의 처절한 저항과 절망적인 최후.
현경의 의식은 걷잡을 수 없이 깊은 과거의 심연, 테리우스가 겪었던 절망의 끝자락으로 가라앉았다.
불길의 뜨거운 열기도, 살을 에는 듯한 영혼들의 비명도, 자신을 묶었던 쇠사슬의 차가운 감촉마저도 순간 희미해졌다.
그의 눈앞, 아니, 그의 존재 전체를 뒤덮은 것은 테리우스가 마지막으로 목격했던 참혹하고 절망적인 광경, 바로 수메르로의 멸망 그 자체였다.
꿈일지도 모른다는 자기기만은 산산조각 났고, 그는 냉혹한 현실의 무게를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현경이 눈을 뜨기 한참 전, 투바의 숲 상공
날카로운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칠흑 같은 날개의 루시퍼와 순백의 날개를 가진 엔젤페가서스 미카엘이 투바의 숲 상공을 급박하게 날고 있었다.
검은 복장의 사내, 케이는 허리춤에 찬 통신용 오브가 섬뜩한 붉은빛을 발하며 진동하는 것을 느끼고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 그가 설치했던 제단이 완전히 파괴되었음을 알리는 명백한 신호였다.
예정보다 너무 빨랐다.
아니, 헬켈베로스가 경로를 이탈하면서 계획 자체가 완전히 틀어져 버렸다.
"케이님! 무슨 일이에요? 갑자기 방향을 바꾸시고...!"
미카엘의 등 위에서, 이제는 어엿한 숙녀로 성장한 레나가 불안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 역시 케이의 굳은 표정과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 그리고 통신 오브의 불길한 빛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6년간의 기다림 끝에 마주할 오빠 생각에 부풀었던 마음이 차갑게 식어내렸다.
케이는 잠시 침묵했다.
이 어린 소녀에게 다가올지도 모르는 가혹한 진실을 설명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고, 불필요한 공포에 빠뜨리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알아야 했다.
자신들이 맞닥뜨릴지도 모르는 위험의 크기를, 그리고 그녀의 오빠가 처한 상황의 심각성을.
"이변이 발생했다, 레나."
케이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낮고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검붉은 눈동자가 순간 번뜩이는 것 같았다.
"'매개자'... 아니, 현경을 운반하도록 계획했던 헬켈베로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의식 전에 소환되어 제단을 파괴하고... 투바의 숲을 이탈했다."
"헬켈베로스가요...? 그럼 오빠는... 오빠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레나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높아졌다. 그녀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아직 단정할 순 없다. 하지만... 놈이 향하는 곳이 좋지 않아."
케이는 굳은 표정으로 먼 곳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 끝에 보이지는 않지만 저 방향 넘어에는 지금 현재 희미하게 검붉은 기운이 피어오르는 도시, 수메르로가 있었다.
"수메르로... 그곳에는 지키는 기사단이 있다. 어떻게든 내가 가기 전까지 수호 기사 테리우스가 버텨주길 바랄 뿐이다."
케이는 레나에게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루시퍼를 더욱 빠르게 몰았다. 검은 날개가 허공을 가르며 속도를 높였다. 미카엘을 탄 레나 역시 터질 듯한 불안감을 애써 누르며, 케이의 뒤를 바짝 쫓았다. 겉보기에는 평화로워 보이는 푸른 하늘 아래, 걷잡을 수 없는 거대한 비극의 서막이 조용히 드리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