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멸망의 기억

하늘은 온통 검은 재와 유독한 연기로 뒤덮여 있었다. 한때 장엄했던 수메르로의 하얀 성벽은 곳곳이 무너져 내렸고, 아름다웠던 거리에는 불길이 치솟아 사람들의 비명과 뒤섞여 아비규환을 이루고 있었다.

"크아아아아!"

거대한 그림자가 도시 중심부를 뒤덮었다.

뱃속의 '지옥로'로부터 검붉은 불꽃을 내뿜어 모든 대지를 살라먹는 지옥의 개, 헬켈베로스.

그 거대한 몸체는 마치 살아있는 재앙과 같았고, 놈의 거대한 아가리에서는 도시를 집어삼킬 듯한 지옥불이 끊임없이 토해져 나왔다.

"테리우스 님! 더 이상 버틸 수 없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부관 기사가 절규하며 외쳤다. 그의 갑옷은 찢겨나가고 방패는 녹아내려 있었다. 주변에는 쓰러진 기사들과 불타는 민간인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테리우스는 부서진 성벽의 잔해 위에서 헬켈베로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은빛 갑옷 역시 검게 그을리고 곳곳이 찌그러져 있었지만, 눈빛만은 여전히 꺾이지 않은 강철 같은 의지를 담고 있었다.

그의 오른손에는 푸른 빛을 은은하게 발하는 검, 붐크래프트가 들려 있었다.

"아직이다! 수메르로는 무너지지 않는다!"

테리우스는 붐크래프트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동시에 허리춤에 달린 동전으로 보이는 무언가가, 오클이라 불리는 것이 빛을 잃으며 분해되어, 검으로 흡수된다. 그 주변으로 푸른 빛을 내는 작은 에너지 점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익숙하게 검을 휘둘러, 그 에너지 점들을 허공으로 쏘아 올렸다. 점들은 밤하늘의 별처럼 흩어지며 거대한 독수리의 형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치 살아있는 듯 미세하게 움직이는 푸른 별자리였다.

"날아가! 가서, 수메르로 수호 기사단의 분노를 보여줘라!"

독수리 형상의 에너지 점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약하게 빛을 터뜨리며 추진력을 얻어, 헬켈베로스를 향해 날아갔다.

푸른 별자리가 밤하늘을 가르는 듯한 장관이었다.

키아아악!

헬켈베로스의 머리가 푸른 독수리를 향해 맹렬한 지옥불을 뿜어냈다. 하지만 독수리는 불길 속에서도 흩어지지 않고, 오히려 불길을 가르며 헬켈베로스의 거대한 몸체에 부딪혔다.

테리우스가 붐크래프트의 손잡이에 달린 기폭 스위치를 눌렀다. 그의 의지에 응답하듯, 검날부터 보이지 않는 마력선이 독수리를 이루던 점들로 빠르게 이어졌다.

콰콰콰콰쾅!

푸른 빛줄기가 섬광처럼 터져 나오며 헬켈베로스의 단단한 외피를 강타했다!

마력선으로 연결된 에너지 점들이 연쇄적으로 폭발하며 놈의 거대한 몸체를 뒤흔들었다.

헬켈베로스는 고통스러운 듯 괴성을 질렀고, 폭발이 일어난 부위에서는 검은 피와 같은 액체가 뿜어져 나왔다.

"성공인가!"

살아남은 기사들의 눈에 희망의 빛이 어렸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크르르르르...!

헬켈베로스의 상처는 영혼을 빨아들이며 순식간에 아물었고, 놈의 붉은 눈은 이전보다 더욱 강렬한 분노와 살의를 담고 테리우스를 향했다.

테리우스의 공격은 강력했지만, 도시 전체를 삼키며 끊임없이 에너지를 흡수하는 헬켈베로스에게는 치명상을 입히기엔 역부족이었다.

'이럴 수가... 붐크래프트의 최대 힘으로도...!'

테리우스는 절망감을 느꼈다.

수메르로에 전해내려오는 강력한 아티팩트조차 이 재앙 앞에서는 무력했다.

헬켈베로스의 거대한 입이 벌어졌다. 그 안에서는 단순히 뜨거운 불길이 아니라, 영혼마저 빨아들일 듯한 칠흑 같은 어둠과 지옥의 에너지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피하십시오, 테리우스 님!"

부관이 다급하게 외쳤지만, 테리우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 없었다.

헬켈베로스가 뿜어내는 압도적인 기운이 그의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 남은 오클을 분해시켜 마력을 쥐어짜내 붐크래프트 앞에 희미한 방어막을 펼치는 것이 고작이었다.

섬광.

헬켈베로스의 아가리에서 뿜어져 나온 지옥의 에너지가 수메르로의 하늘을 갈랐다.

테리우스의 빈약한 방어막은 순식간에 부서졌고, 강력한 충격파가 그의 온몸을 강타했다.

갑옷은 종잇장처럼 찢겨나가고,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과 함께 그의 의식은 아득해져 갔다.

마지막 순간, 그의 손에서 붐크래프트가 떨어져 나가 폐허가 된 땅바닥에 비스듬히 박혔다.

그리고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헬켈베로스의 거대한 아가리와, 그 너머로 보이는... 무너진 도시와 절규하는 사람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크윽.. 수메르로... 미안하다...'

테리우스의 의식은 거기서 끊겼다.

수메르로를 지키지 못했다는 처절한 자책감, 압도적인 힘 앞에 스러져가는 무력감,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놓지 못했던 도시에 대한 애정과 미안함...

그 모든 감정과 고통, 참혹한 광경의 기억은 잔인하리만치 생생하게, 고스란히 현경 자신의 것처럼 그의 영혼 깊숙이 파고들었다.


수호 기사 테리우스의 의식이 끊어진 폐허 위로, 거대한 지옥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의 마지막 저항은 처절했지만, 헬켈베로스에게는 잠시 발을 묶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다.

놈의 붉은 눈은 이제 방해꾼이 사라진 도시를 탐욕스럽게 훑었다. 아직 숨 쉬고 있는 생명의 기운, 공포에 질려 떠는 영혼들의 미약한 빛깔을 감지하며 만족스러운 듯 낮게 울부짖었다.

크르르르...

헬켈베로스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놈의 거대한 아가리에서 다시 한번 지옥불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이번에는 테리우스를 상대할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광범위하고 무차별적인 불길이었다.

불길은 아직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건물들을 순식간에 녹여내렸고, 골목과 지하수로에 숨어있던 마지막 생존자들마저 잿더미로 만들었다.

"안 돼! 살려줘!" "엄마! 아빠!"

단말마의 비명조차 지옥불에 삼켜져 제대로 터져 나오지 못했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용광로처럼 변해갔다.

헬켈베로스는 단순히 파괴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놈의 발밑, 검붉게 물든 대지에서부터 섬뜩한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헬켈베로스의 '지옥로'에서 흘러나온 힘이었다.

지옥불에 살라먹힌 영혼들은 고통 속에서 육신을 벗어나 허공을 떠돌았지만, 그마저도 자유롭지 못했다.

지옥로의 힘은 마치 거대한 자석처럼 영혼들을 끌어당겼다.

수십만 개의 빛점처럼 보이는 영혼들이 속수무책으로 헬켈베로스에게 흡수되어 갔다. 영혼들은 지옥로 안에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고통 속에서 에너지를 착취당하며, 헬켈베로스의 힘을 더욱 키우는 연료가 될 운명이었다.

한때 번성했던 약 20만 인구의 도시 수메르로는 그렇게, 이름 없는 지옥 마수의 잔혹한 만찬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갔다. 하늘에는 검은 재만이 눈처럼 흩날릴 뿐이었다.


다시, 현경

"크윽... 아아아악!"

참혹한 멸망의 기억과 테리우스의 마지막 감정이 폭풍처럼 휘몰아치자, 현경은 잠시 잃었던 의식을 되찾으며 격렬한 고통 속에 몸부림쳤다.

지옥로의 뜨거운 공기가 다시 폐부를 찔렀고, 주변에서 울려 퍼지는 영혼들의 비명이 현실감을 일깨웠다.

꿈이 아니었다. 단 한순간도 꿈이었던 적이 없었다. 이 모든 것은 끔찍한 현실이었다.

수메르로를 지키지 못했다는 처절한 자책감, 압도적인 힘 앞에 스러져가는 무력감,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놓지 못했던 도시에 대한 애정과 미안함...

테리우스의 감정이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생생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그 모든 것을 앗아간 헬켈베로스에 대한 강렬한 증오와 분노가 속에서부터 끓어올랐다.

하지만 그 모든 감정들을 짓누르는 더 큰 공포가 현경을 사로잡았다.

'...내 동생은...?'

자신의 소원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알 수 없다는 불안감.

혹시 내 동생마저 이 지옥 같은 곳에 끌려와 고통받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상상.

현경은 미친 듯이 주변을 둘러보며 동생의 흔적을 찾으려 했지만, 보이는 것은 절망적인 영혼들의 모습뿐이었다.

"얘야! 내 동생아! 어디 있어! 대답해!"

목이 터져라 외쳐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공허한 메아리와 영혼들의 울부짖음뿐이었다.

절망감이 온몸을 짓눌렀지만, 현경은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었다. 테리우스의 마지막 부탁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동생을 찾아야 했다.

살아있을 것이라는 희망, 아니, 반드시 살아있어야만 한다는 간절함이 그의 눈빛에 다시 힘을 불어넣었다.

현경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테리우스에게 받은 힘이 온몸에 넘실거렸다. 그는 다시 한번 가마솥의 높은 벽과, 기억 속 희미하게 일렁이던 공간의 균열을 노려보았다.

'나가야 한다. 반드시.'

결의를 다진 현경은 주변을 둘러보며 탈출구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방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아니, 거대한 가마솥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벽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았고, 표면은 미끄러운 금속 재질로 되어 있어 맨손으로 기어오르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테리우스의 기억 속에... 분명...'

현경은 테리우스에게서 흘러 들어온 방대한 기억 속에서 탈출의 실마리를 찾으려 애썼다.

수많은 정보 속에서, 그는 지옥로의 구조와 관련된 희미한 단서를 발견했다.

이 거대한 가마솥은 단순히 영혼을 가두고 태우는 곳이 아니었다. 헬켈베로스가 이동하며 영혼을 수집하는 일종의 '이동식 지옥'이었고, 어딘가에는 외부와 연결되는 불안정한 균열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 저기다!'

현경의 시선이 가마솥 벽의 한 지점에 멈췄다.

다른 곳과는 미세하게 다른, 공간이 희미하게 일그러져 보이는 부분이 있었다. 테리우스의 기억 속 마지막 단편과 일치하는 지점이었다.

그곳이 바로 외부로 통하는 유일한 탈출구일 가능성이 높았다.

문제는 그 균열이 너무 높은 곳에 있다는 것이었다. 어림잡아 수십 미터는 족히 되어 보였다.

'어떻게 저기까지...'

현경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테리우스에게 받은 힘을 떠올렸다.

그의 몸속에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단순히 근력이 강해진 것뿐만 아니라, 테리우스가 사용하던 기사로서의 기술과 마력 운용법까지 어렴풋이 느껴졌다.

현경은 심호흡을 하며 양손에 힘을 집중했다. 테리우스의 기억을 따라, 몸 안의 힘을 끌어올려 발밑으로 모았다. 처음 시도하는 것이었지만, 마치 오랫동안 해왔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힘이 움직였다.

콰앙!

현경의 발밑 땅바닥이 작게 움푹 패이며, 그의 몸이 폭발적인 추진력과 함께 위로 솟구쳐 올랐다! 주변의 영혼들이 놀란 듯 그를 바라보았다.

"크윽!"

갑작스러운 도약에 몸이 휘청거렸지만, 현경은 테리우스의 전투 경험을 본능적으로 떠올리며 공중에서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는 가마솥 벽에 발을 디디고, 다시 한번 힘을 모아 박차고 오르기를 반복했다.

마치 벽을 타고 달리는 듯한 기이한 광경이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도약을 거듭할수록 공간의 균열이 점점 가까워졌다. 하지만 동시에 체력과 집중력도 빠르게 소모되었다. 지옥로의 뜨거운 열기와 영혼들의 비명이 그의 정신을 끊임없이 뒤흔들었다.

'조금만 더...!'

마지막 도약을 위해 모든 힘을 짜낸 현경은 균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공간의 뒤틀림에 닿는 순간, 강렬한 빛과 함께 그의 몸이 균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으아아악!"

현경은 비명을 질렀다.

몸이 찢어질 듯한 압력과 함께 사방이 뒤틀리는 혼돈의 공간에 던져졌다.

방향 감각은 완전히 상실되었고, 눈앞에는 형형색색의 빛줄기와 기괴한 형상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지옥로의 열기나 영혼들의 비명과는 또 다른 종류의, 근원적인 혼돈이 그의 정신을 뒤흔들었다.

시간 감각마저 무뎌지는 듯한 혼란 속에서, 테리우스에게 받은 힘이 본능적으로 몸을 보호하려 발버둥 쳤다.

강력한 힘이 그의 몸 주위에 희미한 보호막을 형성하며, 그를 찢어발기려는 공간의 압력에 간신히 맞섰다.

하지만 보호막은 불안정하게 흔들렸고, 혼돈의 에너지는 끊임없이 틈새를 파고들며 그의 육체와 정신을 갉아먹으려 했다.

온몸의 신경이 끊어질 듯한 고통과 현기증 속에서도 현경은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여기서 쓰러질 수는 없어...! 동생을... 찾아야...'

의식이 흐려지려는 순간마다 동생의 얼굴을 떠올리며 간신히 버텼다.

테리우스의 마지막 염원과 동생을 향한 간절함이 그의 꺼져가는 의지를 붙들었다.

그는 혼돈의 폭풍 속에서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어디로 이어질지 모르는 이 끔찍한 여정을 온몸으로 견뎌내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버텼을까.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혼돈 속 사투 중.

갑자기 공간 전체가 진동하며 울리기 시작했다.

이 지옥의 세계가 파괴될 것만 같은 울림 뒤에

곧바로 그의 등으로 느껴지는 섬뜩한 열기에 현경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현경이 몸부림치는 혼돈의 균열 속.

등 뒤, 그가 방금 전까지 묶여있던 가마솥 방향에서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시뻘건 지옥불이 가마솥 깊은 곳에서부터 거대한 용의 형상으로 꿈틀거리며 솟아올라, 무시무시한 기세로 균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와 현경을 향해 덮쳐왔다!

마치 탈출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아니면 지옥이 무너져내리기 직전에 제 생존을 위한 최후 발버둥인 것마냥, 가마솥 자체가 의지를 가지고 그를 추격하는 것만 같았다.

"크아아아악!"

용 형상의 불길은 순식간에 현경의 등 뒤를 덮쳤고, 그를 가마솥 내부로 빨아들였다.

다음 — 6화 : 마수를 먹는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