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마수를 먹는 자

검붉은 기운이 감도는 하늘 아래, 루시퍼와 미카엘이 수메르로 외벽 상공에 도착했다.

케이의 예상보다 훨씬 참혹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한때 위용을 자랑했을 하얀 성벽은 곳곳이 무너져 내렸고, 아름다웠던 시가지는 온통 불길과 검은 연기에 휩싸여 있었다. 살아있는 자의 비명 대신, 허공을 메우는 것은 불길이 타오르는 소리와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굉음뿐이었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무덤처럼 변해버린 모습에, 케이는 자신도 모르게 얕은 침음성을 흘렸다.

'테리우스... 결국 버티지 못했는가.'

그는 등 뒤, 미카엘 위에 타고 있는 그들 따라오는 레나를 잠시 돌아보았다. 이 끔찍한 광경을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충격과 슬픔으로 괴로워할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잠시 여기서 기다려라, 레나."

케이는 레나에게 짧게 말한 뒤, 루시퍼에서 뛰어내리며 허공에 손짓했다. 그의 손끝에서 푸른 빛의 마력이 흘러나와 투명한 막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레나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강력한 은폐의 결계가 수메르로 전체를 순식간에 감쌌다.

"케이님! 지금 뭘...! 오빠는요?!"

결계 너머에서 막혀 들려오는 레나의 다급한 목소리를 뒤로한 채, 케이는 망설임 없이 폐허가 된 도시 안으로 하강했다. 아직 남아있는 희미한 지옥의 기운을 따라, 그는 재앙의 근원, 헬켈베로스가 있을 만한 곳으로 향했다.


"꺄악!"

갑자기 나타난 투명한 벽에 부딪힌 미카엘이 균형을 잃고 허공에서 휘청거렸다. 레나는 미카엘의 목을 꽉 끌어안으며 간신히 떨어지지 않았다.

"결계...? 케이님. 왜 갑자기..."

레나는 눈앞을 가로막은 투명한 결계를 보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결계 너머로는 케이님의 모습도, 폐허가 된 도시의 모습도 희미하게 보였지만, 더 이상 다가갈 수 없었다. 케이님이 자신을 막아선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그렇기에 더욱 불안감이 커졌다.

'안 돼... 오빠가 저 안에 있을지도 몰라! 케이님 혼자서는 위험해!'

레나는 미카엘을 재촉해 결계 주변을 맴돌며 어떻게든 안으로 들어갈 방법을 찾아보려 했지만, 케이가 친 결계는 견고했다. 그녀는 애타는 마음으로 결계로 가려져 내부를 확인할 수 없는 도시를 바라보며 케이와 오빠의 무사만을 간절히 기도할 뿐이었다.


케이는 도시 중심부, 가장 깊은 파괴의 흔적이 남은 광장에 뛰어 내렸다. 주변은 온통 건물의 잔해와 불타버린 시체들로 가득했고, 공기 중에는 역겨운 유황 냄새와 살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그리고 그 광장 한가운데,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불길한 기운을 내뿜으며 거대한 지옥의 개, 헬켈베로스가 서 있었다. 놈은 주변에 영혼의 잔혼마저 탐욕스럽게 빨아들이며 포만감에 찬 듯 낮게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놈의 붉은 눈은 케이의 등장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케이는 불쾌한 표정으로 헬켈베로스를 노려보았다. 자신이 심어놓은 통제의 각인이 느껴지지 않았다. 모종의 이유로 제어가 완전히 풀려버린 듯했다.

"어리석은 축생이로군. 네놈의 주인이 왔거늘,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냐."

케이의 낮고 위압적인 목소리가 광장에 울려 퍼졌다. 그는 헬켈베로스에게 다가가며 말을 이었다.

"명령이다. 당장 그 더러운 주둥이를 멈추고 내 앞에 꿇어라."

하지만 헬켈베로스는 케이의 명령에 복종하기는커녕, 귀찮다는 듯이 그를 향해 머리를 돌리고 위협적인 이빨을 드러냈다. 붉은 눈동자에는 경계심과 함께 명백한 적의가 서려 있었다.

크르르르...!!

"네놈이...!"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반항하는 헬켈베로스의 모습에 케이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그의 인내심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짐승에게는 역시 몽둥이가 약인가."

케이는 차갑게 내뱉으며 허리춤에서 검붉은 빛을 내는 소환 오브, [키메라 오브 - 데블이터]를 꺼내 들었다. 오브가 강렬한 빛을 발하며 허공에 떠오르자, 마력이 소용돌이치며 하나의 인영(人影)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나의 부름에 응하라, 마수를 먹는 자."

빛이 잦아들자,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를 가진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흠잡을 데 없이 깔끔한 붉은색 정장을 차려입고, 하얀 넥타이에는 검은 날개 모양의 네클리스를 달고 있었다.

그는 케이를 향해 과장스러울 정도로 허리를 깊이 숙이며 신사적인 태도로 인사를 올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위대하신 나의 주군, 케이님! 이 미천한 데블이터를 불러주시다니, 황공무지로소이다!"

목소리마저 느끼하게 느껴질 정도의 아첨이었다.

케이는 그 모습을 못마땅하다는 듯 잠시 미간을 찌푸렸지만, 지금은 데블이터의 힘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인사는 됐다. 저기 보이는 버러지 같은 짐승을 제압해라."

케이가 턱짓으로 헬켈베로스를 가리키자, 데블이터는 그제야 주변 상황을 둘러보았다.

폐허가 된 도시와 거대한 지옥개를 번갈아 보던 그의 얼굴에 놀라움과 함께 경멸감이 어렸다.

"오호라... 이런 누추한 곳에 저런 흉물스러운 '마수'가 날뛰고 있었군요. 주군께 심려를 끼치다니, 괘씸하기 짝이 없는..."

데블이터는 헬켈베로스를 향해 거만한 시선을 던지며 말을 이었다.

그는 케이를 대할 때와는 180도 다른, 오만하고 상대를 깔보는 태도를 보였다.

"듣거라, 천박한 마수여. 네놈 따위가 감히 나의 고귀하신 주군께 이빨을 드러내다니, 그 죄, 만번 죽어 마땅하다! 이 몸, 데블이터가 케이님의 명을 받들어 네놈의 추악한 숨통을..."

"시끄럽다." 케이가 데블이터의 말을 끊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빨리 처리해."

"옛!"

케이의 차가운 질책에 데블이터는 잠시 움찔했지만, 이내 헬켈베로스를 향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자세를 낮췄다.

"뭐... 주군께서 분부하시니 어쩔 수 없지. 자, 그럼 시작해볼까? 긍지 높은 데블이터의 이름으로, 네놈을 처절하게..."

데블이터가 또다시 과장된 연극 톤으로 외치는 순간, 헬켈베로스가 먼저 움직였다.

놈은 데블이터에게서 느껴지는 불쾌하고도 강력한 기운에 위협을 느꼈는지, 거대한 아가리를 벌려 검붉은 지옥불을 토해냈다!

"어이쿠!"

데블이터는 특유의 과장된 몸짓으로 불길을 가볍게 피하며 혀를 찼다.

"이런, 이런. 성미도 급하시긴. 신사적인 대화로 해결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으신가 보군?"

데블이터는 여유롭게 말하며 헬켈베로스를 도발했지만, 헬켈베로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한번 거대한 앞발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발톱이 허공을 갈랐지만, 데블이터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헬켈베로스와 똑같은 방식으로 잔상을 남기며 순식간에 놈의 등 뒤로 이동한 것이다.

"느려, 느려! 그런 공격이 통할 거라 생각했나?"

데블이터는 헬켈베로스를 비웃으며 마력을 끌어모아 주먹을 내질렀다.

마수의 존재 자체를 좀먹는 듯한, 악마 포식자 특유의 파괴적인 기운이 담긴, 그야말로 마수에게는 극약과도 같은 주먹이었다.

놈의 등 뒤를 정확히 노린 공격이었지만, 헬켈베로스는 마치 뒤에도 눈이 달린 것처럼 재빨리 몸을 비틀어 피하며 동시에 두꺼운 꼬리로 반격했다!

챙!

데블이터는 예상치 못한 반격에 급히 팔을 들어 꼬리를 막아냈다. 둔탁한 충격음과 함께 데블이터가 뒤로 몇 걸음 밀려났다.

"호오? 제법이군. 단순한 짐승은 아닌 모양이야."

데블이터는 처음으로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헬켈베로스는 데블이터의 말에 대꾸할 생각조차 없는 듯, 더욱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거대한 몸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민첩함으로 앞발과 꼬리를 휘두르고, 틈틈이 지옥불을 토해내며 데블이터를 몰아붙였다.

"크크큭... 이거 재미있어지는군!"

데블이터는 헬켈베로스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하거나 막아내며 광소했다.

그는 아직 전력을 다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헬켈베로스의 공격 패턴을 분석하고 약점을 찾으려는 듯,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하며 탐색전을 벌였다.

그의 움직임에는 여전히 상대를 얕보는 듯한 과장된 몸짓과 불필요한 포즈가 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는 케이의 표정은 점점 더 싸늘하게 굳어갔다.

그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데블이터!" 케이의 분노 서린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장난은 거기까지다. 더 이상 시간을 끌면 네놈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케이의 살기 어린 일갈에 데블이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그는 케이의 분노가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고 있었다.

괜히 딴짓을 하다가는 정말 험한 꼴을 당할지도 몰랐다.

"큼...! 알겠습니다, 주군. 명 받들겠습니다."

이대로 시간을 끌다가는 정말 케이의 분노를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데블이터는 마침내 전력을 개방하기로 마음먹었다.

"보여주지. 진짜 마수 포식자의 힘을!"

데블이터가 외치자, 그의 몸에서 검붉은 마력이 폭풍처럼 터져 나왔다.

말끔했던 붉은 정장이 갈가리 찢겨나가며 그의 몸이 기괴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피부는 더욱 붉고 단단하게 변하고, 등에서는 박쥐와 같은 거대한 날개가 솟아났다.

손톱과 발톱은 맹수처럼 날카로워졌으며, 입은 턱까지 찢어져 날카로운 이빨들이 드러났다.

신사적인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이름 그대로 악마를 삼키는 포식자의 흉측한 본모습이 드러난 것이다!

크아아아아-!

변형을 마친 데블이터가 포효하자, 주변의 대기가 그의 압도적인 마력에 짓눌리는 듯 진동했다.

헬켈베로스조차 데블이터의 변모에 잠시 주춤하며 경계심을 드러냈다.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위압감이었다.

"자, 이제 진짜 파티 시간이다, 멍멍아!"

흉측하게 변한 모습과는 달리, 데블이터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장난기와 경박함이 묻어났다.

그는 거대한 날개를 한번 휘젓는 것만으로 순식간에 헬켈베로스의 코앞까지 거리를 좁혔다.

콰앙!

데블이터가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주먹을 휘두르자, 헬켈베로스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정통으로 얼굴을 가격당했다.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력한 일격에 헬켈베로스의 거체가 뒤로 휘청거렸다.

크르르르...!!

고통과 분노에 찬 헬켈베로스의 세 개의 머리가 동시에 울부짖으며 데블이터를 향해 달려들었다.

거대한 송곳니가 데블이터의 몸을 꿰뚫으려 했지만, 데블이터는 비웃듯 가볍게 몸을 날려 피했다.

"하! 겨우 이 정도냐? 실망인데!"

데블이터는 공중에서 몸을 회전시키며 발뒤꿈치로 헬켈베로스의 머리를 강타했다.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헬켈베로스의 머리가 땅에 처박혔다. 하지만 헬켈베로스는 즉시 데블이터를 물어뜯으려 했고, 동시에 꼬리로 그의 하반신을 후려쳤다.

"이런, 귀찮게 구는군!"

데블이터는 헬켈베로스의 집요한 공격에 짜증 섞인 목소리를 내뱉으며 몸을 뒤로 뺐다. 그의 붉은 피부 곳곳에 얕은 상처들이 생겨났지만, 금세 검붉은 연기와 함께 사라졌다. 악마적인 재생력이었다.

"슬슬 끝을 내야겠군. 주군께서 기다리신다."

데블이터는 헬켈베로스와 거리를 벌린 채 입을 쩍 벌렸다. 그러자 그의 입 안에서 섬뜩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의 이빨들이 기이한 형태로 변형되며 하나로 합쳐지더니, 순식간에 날카롭고 순백의 빛을 내는 거대한 창의 형태로 변했다!

[아귀(餓鬼)의 창]! 마력을 봉인하는 힘을 가진, 데블이터의 이빨로 만들어진 창이었다.

"이걸로 네놈의 더러운 숨통을 끊어주마!"

창을 손에 쥔 데블이터의 기세가 더욱 거세졌다. 그는 창을 고쳐잡고 헬켈베로스를 향해 돌진했다. 헬켈베로스 역시 데블이터의 창에서 느껴지는 불길한 기운에 본능적인 위협을 느끼고, 세 개의 아가리에서 동시에 검붉은 지옥불을 내뿜으며 맞섰다!

콰아아아아아아!!

순백의 창과 검붉은 지옥불이 정면으로 충돌하며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폭발의 여파로 주변의 건물 잔해가 먼지처럼 흩날리고, 땅이 깊게 패였다. 케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마력으로 자신을 보호했다.

폭발의 연기가 걷히자, 데블이터와 헬켈베로스가 서로를 마주 본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데블이터의 창 끝은 약간 그을렸지만 여전히 서슬 퍼런 빛을 유지하고 있었고, 헬켈베로스의 몸 곳곳에는 창에 긁힌 듯한 상처들이 보였다.

승부는 아직 나지 않았다. 두 괴물의 격돌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크르르... 제법 버티는군, 개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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